여름날의 온기

- 잊고 지냈던 남편의 손을 다시 잡은 날 -

by홍당무

“아 손 시려. 너무 춥다.”

“그래?”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가족들과 장거리 여행을 할 때면 에어컨 바람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는 한다. 차 안을 가득 메운 서늘한 냉기가 내 몸을 침투해 오면 시린 손발을 꼭 움켜쥐고는 아무도 몰래 에어컨 바람 세기를 살짝 낮춘다. 하지만 이내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린다.


“엄마, 너무 더워요!”

“...”


심장을 내려앉게 하는 사춘기 아이의 말 한마디에 조용히 에어컨 바람 세기를 다시 높인다. 손과 발을 꽉 움켜쥔 채. 조금이라도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덥고 습했다. 거실의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에어컨을 볼 때면 나는 사춘기 아들의 눈치를 보듯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한다. 지구 온난화다 뭐다 연일 시끄럽게 보도되는 세상의 목소리보다 아들의 목소리가 더 무서웠기에. 지구에는 정말 미안하지만, 환경을 향한 양심은 몇 년만 접어 두기로 했다.


‘우리 집에 사춘기가 지나가면 정말 아껴 쓰겠습니다. 용서하세요.’


하루는 야구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집에서 한 시간가량 차를 타고 이동하던 날이었다. 담요를 챙긴다는 것이, 아이들의 물과 간식을 챙기느라 여느 때처럼 내 것은 깜빡 잊은 채 차에 올라탔다.


‘아 큰일 났다. 한 시간을 가야 하는데.’


추위 때문에 남편 옆자리를 포기하고 뒷좌석으로까지 갔건만, 그래도 에어컨 바람에 온몸이 시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내 손끝과 발끝은 한겨울의 그때처럼 차가워졌고, 찾아온 냉기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되어 심장 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에어컨 바람을 조용히 다른 곳으로 돌려봤지만, 한번 밴 냉기는 쉽사리 빠져나갈 줄 몰랐다.


‘조금만 더 버티자. 다 왔다. 밖에 나가면 괜찮을 거야.’


한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체감상 몇 시간 동안 추위와 싸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야구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지쳐있었다. 그렇게 야구장에 도착한 우리는 마침내 푹푹 찌는 한낮의 폭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 더워. 진짜 덥네.”

“엄마 너무 더워요. 그리고 형이 자꾸 짜증 내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얘들아, 원래 여름은 더운 거야. 조금만 참자. 야구장에 들어가면 더 나을 거야. 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게.”

“에이 더운데…. 아 더워!”


그럼 그렇지. 차에서 내린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덥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들 앞에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 몸에 잠식해 있는 추위를 몰아내 줄 뜨거운 기온이 내심 반가웠다. 하지만 1시간 동안 얼어붙었던 몸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길을 걸으면서도 남몰래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며 꽁꽁 언 몸을 풀어내느라 혼자만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뭉툭하고 투박한 무언가가 툭 내 손에 포개져 들어왔다. 마치 붕어빵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작은 난로를 얹어 주는 것 같기도 한.

뭉툭하고 까칠한 그 느낌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놀랍도록 포근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되찾은 듯한 기분에, 내 몸의 온 신경은 그 따뜻한 기운에 한껏 빠져들었다.


남편의 손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잊고 지냈던 손.


매일 손 안으로 꽉 차게 들어오던 작고 부드러운 감각만 기억하는 내게, 남편의 손은 크고 뭉툭했다. 낯설었다. 하지만 유난히 따뜻했고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 순간 내 손은 첫 연애의 달콤함에 취한 소녀의 뺨과 같이 발그스레한 수줍은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리듬에 낯선 이 손의 감각이 날아갈까 봐 아주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감싼 그 따스한 온기는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한여름의 태양도 쫓아내지 못한 추위를 몰아내 주었다. 몸이 따뜻해질수록 넘실대는 파도처럼 내 기분을 붕 뜨게 만들었다. 연애 때 보던 분홍빛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세포가 살짝 쿵 춤추는 듯한 그 행복감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살짝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 옛날의 ‘남자친구'를 보았다.


우리의 연애 시절. 남편과 맞잡은 손길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육아와 온라인 게임 일에 치여 쏜살같이 지나온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이 기억 속에서 번뜩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에 적응하느라 고단했을 우리, 그럼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우리는 어느새 세상 어떤 팀보다 똘똘 뭉친 강한 팀이 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잡은 그 손의 어색함은 더위를 핑계로 결국 몇 분 되지 않아 손을 놓게 했지만, 그 온기는 오래도록 손끝을 맴돌며 마음을 넘실거리게 했다. 그리고 불볕더위보다 더 뜨겁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엄마 너무 더워요. 시우가 짜증 내요!”

“아니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형이 짜증 내요!”

“아….”


내 앞으로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가는 남자 셋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우리, 그 투덕거림이 오늘은 왠지 밉지만은 않았다. 문득 남편의 등, 땀으로 젖은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땀은 세상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흘린 애씀, 고됨, 인내, 그리고 사랑일 것이다. 남편과 마주 잡았던 손이 더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 기운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힘든 만큼, 나만큼이나 이 남자의 어깨도 무거웠을 텐데,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했을지도. 그동안 나의 고됨만 안쓰러워 남편의 수고를 헤아려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여름의 태양 아래 남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가만히 말을 건네주었다.


‘아 여기 야구장이지! 그래! 오늘은 내가 쏜다!’


나는 눈을 깜빡여 고여있던 눈물을 떨어트린 후 씩씩하게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앞서가던 남자 셋에게 힘껏 뛰어가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쏜다! 야구장은 치킨이지! 치킨 사러 가자!”

“오예!! 크림 새우도요!”

“좋다. 좋아. 오빠는 오늘 돈 쓰지 마!”

“오호호. 갑자기?”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맛있게 먹고 우리 더 잘살아 보자! 오빠.”

“???”


작은 눈이 토끼 눈처럼 커지는 묘한 광경으로 나를 쳐다본 남편은, 이내 스르르 풀어지더니 옅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기분 좋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닭을 받아 들고 자리를 옮기는 내 뒤로 남자 셋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노릇하고 고소한 냄새에 마법에 걸린 듯 졸졸 따라오는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풀어 아이들에게 어떻게 나눠 줄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남편이 불쑥 손을 뻗어 통닭 한 조각을 집어 들더니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선희야, 먼저 먹어봐. 항상 너부터 챙겨. 아이들 말고.”


기름에 노릇하고 바싹하게 튀겨진 통닭이 이렇게 달콤했나! 기름만은 온데간데없고 설탕을 한가득 뿌린 듯 한 맛이 났다. 연애 시절 마주 앉아 웃으며 먹던 그 통닭의 다정한 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참 열심히만 살았나 보다. 둘만의 감정을 참 오랜만에 느끼는 것을 보면.


나는 다른 한 손으로 슬그머니 남편이 손을 꼭 잡았다. 내 작은 손이 남편의 두툼한 주먹을 다 감싸 안지는 못해도, 온기만큼은 남김없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그동안 나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저 밥하고 빨래만 해주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얼어붙고 얼어붙어 한여름에도 녹지 못하는 응어리진 서운함의 조각들로 꽉 채워졌던 마음이, 남편의 맞잡은 손 한 번에 그리고 달콤한 통닭 한 조각에 사르르 녹아내려 버렸다.


아이들이 다 자는 늦은 저녁 아직도 나는 손끝을 맴도는 남편의 온기를 느낀다. 조금은 거칠고 투박해졌지만,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고 든든하게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이 순간 나는,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가장 든든한 내 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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