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에 대해 -
“나 정말 행복해!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당~”
“응?? 행복하다고??”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행복하다는 말은.
나에게는 평생을 쫒는 말이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런 말인데. 내 친구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편하게 내뱉는 단어. 카페의 세련되고 차가운 무채색 가구들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동화 주인공 같은 밝은 표정으로 꿈같은 단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행복...
‘나는 과연, 행복한가?’
오늘 정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오랜만의 화장인 듯, 군데군데 파운데이션이 뭉쳐 있었고, 뽀얗던 피부에는 트러블을 가리기 위한 패치가 어색하게 붙어 있었다. 동글동글 귀엽기만 하던 얼굴은 볼이 살짝 패인 세월을 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눈빛과 내려올 줄 모르는 입꼬리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아 보이네. 살기 편한가 보다. 부럽다.’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조금씩 끊기는 대화 사이로 어색한 손짓과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시선만이 우리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식 이야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로 우리의 어색한 공간은 채워져 나갔고, 어느덧 친구와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화 속에서, 내 마음에 콕 박혀버린 단어 하나를 슬며시 건져 올렸다. 마치 친구는 그 단어를 나에게 심어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사람 같았다.
행복.
사실 요즘 마음이 밑바닥으로 떨어져 좀처럼 들어 올려지지가 않았다. 색도 냄새도 사라져 버린 좁고 깊은 웅덩이에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당차게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며 이런 나 스스로가 못났다 자바카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 종일 고개를 들어 윗 세상을 바라보느라 뒷목이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것에 지쳐버렸나 보다.
번아웃.
사실 이런 증상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시기가 와도 그냥 버티면 지나가기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버티면 그뿐.
시간이 가면 그뿐.
하지만 마음의 회복력도 기분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드는 건지, 저절로 괜찮아지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괜찮아질 것 같은데, 그런 노력을 해본 적이 없기에 나는 당연히 이겨내는 방법 따위는 잘 모른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깊은숨을 몰아쉬며 노트북을 열었다. 가족 모두가 자는 늦은 밤 그렇게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 요즘 이상해. 우울하고 기운이 없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남편이 데리고 나가면 식당에 가서 점심도 잘 먹고 그래. 잠은 뭐 잘 못 자고. 가바라도 먹어 볼까? 신경 안정에는 가바가 좋다던데.”
“가바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추천 추천... 그런데 이런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시나요?”
“거의 2주 다 되어가.”
“그럼 영양제만 드실 것이 아니라, 병원을 방문해 전문가와 상담을 받아보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역시나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만 더 확실히 확인한 채, 한밤중에 시작된 조용한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인공지능과 이야기한 대로, 요즘 나는 내 몸의 모든 배터리가 방전되어, 화면이 서서히 꺼져가는 핸드폰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기에, 마음껏 아프고만 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약속을 잡아 밖으로 나가보라는 인공지능의 조언대로, 간신히 마음을 내어 약속을 잡았다. 사실 약속시간 5분 전까지도 약속을 깰, 수만 가지 핑계를 생각해 내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둘째가 갑자기 아프다고 할까?’
‘첫째가 학원에 문제집 좀 가져다 달라고 한다고 할까?’
‘친정집에 일이 생겼다고 할까?’
이렇게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이 친구를 만난 것이다.
사실 만나고 나서도 빨리 집에 들어갈 방법이 뭘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친구의 긍정적인 기운에 이끌렸던 걸까? 아니면 오랜만에 마주한 그 밝고 맑은 아우라에 호기심이 생겼던 걸까? 아니면 고갈되었던 에너지가 나도 모르게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던 걸까? 어색함은 어느새 달아나 있었고, 그 친구의 입에서 손짓에서 뿜어 나오는 반짝이는 빛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예쁜 그 빛이 참 좋아, 이야기하는 친구를 바라보며 친구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와 좋다.’
어렸을 때부터 내 친구는 밝고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다. 뭔가 궁금한 일이 생기면 웃으며 주저 없이 그것에 뛰어들었고, 마음이 식으면 그 자리를 홀연히 나올 줄 아는 아이.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자존감 높은 아이.
그때는 그게 어린 날의 허풍이거나 사소한 농담이나 유머쯤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는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친구에게는 그 젊은 시절보다, 유난히도 밝은 햇살이 한가득 내리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슬며시 접히는 눈가의 수줍은 잔주름마저 눈부시게 반짝일 정도로. 가느다랗게 웃는 입꼬리가 사랑스러울 정도로.
“선희야, 너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응, 나는 어릴 때로 돌아가서 다시 살아보고 싶어. 그런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그냥 지금이 나은 건가?"
“나는 지금이 좋아. 아주 행복해.”
“행복해?”
“응. 며칠 전에 애니어그램 검사를 했는데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엄마까지 성격이 다 반대더라. 그런데 그런 점이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더라고. 그러니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걱정 없이 할 수 있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생각해 보면 다 좋은 거니 마음 편한 지금이 오히려 정말 행복해.”
“성격이 반대면 피곤하지 않아? 이해도 잘 안 되고, 부딪히기도 하잖아.”
“그런 점도 있지만, 그것도 재미지. 그래도 결국 서로 보완해 주고 잘 살잖아. 엄마랑도 예전보다 갈등도 덜하고 그래서 지금이 좋아.”
“그래? 나는 마흔이 딱 넘어가니 자식들은 손은 덜 간다 해도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은 새로 늘어가지, 부모님은 편찮으시기 시작하지, 남편하고 애틋한 것도 예전보다는 덜 하지. 날이 갈수록 삶이 버겁다 느껴지던데.”
“왜?”
“...”
마흔이라는 나이는 젖은 솜이불 같은 찝찝함과 무거움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는데, 친구는 그 시간마저 가볍게 털어낸 얼굴이었다. 삶의 고난이 자신의 색을 빼앗지 못하도록 살아온 듯한 그늘 없는 친구의 모습이 한없이 대단해 보여, 가슴 한 구석이 뜨겁게 부러워졌다.
만나는 내내 반짝이던 눈빛, 친구의 손짓과 몸짓에서 피어나던 별빛 같은 아우라, 마주 앉아 웃던 그 입술의 온도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낙천적인 성격이 아닐까 싶다.
그토록 반짝이던 내 친구처럼.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근면, 성실, 그리고 인내라고 굳게 믿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고통과 우울, 불안은 내가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할 마땅한 대가라고 여겼다.
‘내가 조금 지치고 우울한 것쯤이야, 나중에 멋진 성취로 다 보상받을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하지만 살아보니 알겠더라. 내가 나에게 낸 상처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온전히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울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엉겨 붙어 깊은 흉터가 되고 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원래의 시절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몸에 새겨진 흉터는 좋은 생각이 피어날 자리를 빼앗고 습관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난다. 그것이 반복되면 남는 생채기들은 켜켜이 쌓여, 끝에는 애써 이뤄낸 노력의 결과들을 속절없이 무너트리는 결과를 남기기도 한다.
비록 속도가 느려 답답해 보일지라도, 자신을 따뜻하게 긍정하고 어루만지며 보듬어갈 때, 마침내 꿈에 도달한 그 순간의 행복은 비로소 온전한 모양을 갖춘다는 것을 내 친구가 보여 주었다.
‘행복해. 나는 정말 행복해.’ 하는 귀여운 주문을 나에게 걸듯 이야기하는 친구가 오늘따라 그 어떤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철학자보다 멋져 보였다.
내 친구가 가진 긍정의 힘, 낙천성, 그리고 자기 자신을 너그럽게 품어주는 그 태도가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전해졌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부럽고도 아름다운 능력임을, 오늘 친구를 통해 배웠다.
마흔이 넘어 더 빛나는, 아니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언제나 환하게 빛날 내 친구.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스스로를 가혹하게 내모느라 지쳐있던 내게, “행복하라"며 다정한 마법 같은 주문을 건넨 친구와 함께 한 그날은, 정말이지 내게 꼭 필요한 하루였다.
그날 이후 친구의 주문에 단단히 걸린 듯, 방전되었던 내 몸에도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오르는 에너지에 힘입어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기꺼이 행복한 하루를 꾸려보고, 괜찮다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나를 다독여 본다.
친구와 만난 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내 성격은 원래 이래. 이래서 참 좋아. 지금이 행복해.”라며 환하게 웃던 친구의 얼굴이 자꾸만 마음의 곁을 맴돌며 예쁘게 피어오른다. 나도 친구와 같은 온도의 웃음을 띠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