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던 날

-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

by홍당무

"허리가 아프네. 시우야 이제 곧 비가 오려나 보다."

"네? 허리가 아픈데 왜 비가 와요?"

"크크 그런 게 있어."


40대가 넘어가면서 신기한 증상 중의 하나다. 내 몸의 통증으로 날씨를 예측하게 되는 것. 공기가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이 되면 허리가 가장 먼저 반응한다. 고로 나는 허리가 약했다는 사실을 내 나이 마흔이 넘어 날씨로 알게 되었다. 오늘도 조금씩 조여 오는 기분 나쁜 통증에,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약상자를 꺼내 들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진통제를 찾아 먹으려다, 이내 툭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장마철에 나는 이렇게 반복된 허리 통증과, 오락가락하는 기분에 지독히도 무덥고 습한 나날을 견디고 있었다.



가족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차 한잔을 손에 쥐고 창문에 기댄 채 한참을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두두둑

비가 내렸다.


‘역시 내 일기예보는 틀리지 않았어!’

생각도 잠시, 한 방울 두 방울 내리던 비는 어느 순간 장대비로 변해 거칠게 쏟아 내렸다.


쏟아지는 비에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차를 내려놓고, 아이들 방과 거실 서재 등 창문이 열려 있는 곳으로 분주히 발을 옮겨가며 창문을 닫았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거친 세상으로부터 이 작은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대견하다가도, 문득 저 아이들의 편안함이 못내 부러워지는 밤이다.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와 색이 진해질 대로 진해진 차를 한 모금 입술에 적시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비가 참 좋았는데.’


나는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습기 가득한 물향의 공기 냄새, 우두둑 지붕에 내리는 한옥집의 빗소리, 빗소리 사이로 방안 가득 울려 퍼지는 내 취향의 가요까지. 그 속에는 특별한 하루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 좋은 설렘이 있었다. 특히 이런 날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의 간섭도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 시절의 비는 내 가슴을 충만한 행복감과 편안함으로 가득 채워주는 기분 좋은 매개체였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면서 비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처음에는 신발이었다. 아르바이트 비로 산 애틋한 핑크색 구두를 적셨고, 외출할 때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와 전셋집 바닥을 들뜨게 할까 봐 걱정을 안겨주는 불청객이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로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거나,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할 때, 학교에서 비를 맞고 돌아올 아이들을 생각하면, 비는 고민거리를 얹어주는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해가 갈수록 비는 나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내리는 비를 보며 온갖 생각에 빠져 있었다.

.


기분도 나이가 드는지, 요즘 좀처럼 진심으로 웃을 일이 없다.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즐거운 일이 있어도 그 순간뿐이었다. 아이들 얼굴에 떠날 줄 모르는 웃음과는 분명 결이 달랐다.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야 좋은 일이 생긴다며 자주 웃으라는 어른들을 말씀이 생각나 자주 입꼬리를 올려보려 하지만, 어쩐지 쉽지가 않다.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걱정과 불안 슬며시 자리를 대신했다.


‘내가 하는 육아는 맞는 걸까.’

‘아이들이 잘 크고 있는 것은 맞겠지?’

‘애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나 선생님께 집에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겠지? 친절히 대하겠지?’

‘계획서 낸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열심히 준비했는데..’


오늘도 수많은 걱정을 떠안고 생각에 잠긴 나를, 가만히 지켜봐 주는 이가 있었다.


비.

주룩주룩 내리는 저 비.


나도 알고 있었다. 비가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눈길을 외면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요구라도 할까 봐. 나에게 뭘 더 바랄까 봐.


어떠한 요구도, 그 어떤 말도 들어줄 에너지도, 무엇을 도와줄 마음의 여유도 내겐 없었다.

그저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나를 위해 쏟아 붓기에도 이제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그렇게 비를 외면한 채, 비 내리는 까만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내리는 거야. 그냥 존재하는 거야.’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자고 있었기에.

하지만 똑똑히 들었다. 괜찮다고. 그냥 그렇게 있어도 된다고.

순간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들이 나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묘한 전율이 스쳤다.


‘비에게도 표정이 있었나?’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비빈 후, 창문을 열어 비 내리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우두둑 튕겨 나가는 굵은 빗방울들. 비는 순식간에 손을 적시고 집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놀라 얼른 문을 닫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저 내리고 있었다. 순리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위에서 아래로.

굳이 무언가를 증명하지도, 어떠한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그렇게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무거워진 구름의 자연의 순리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내리는 비는 메마른 땅에 목마름을 채워주고, 더러워진 공기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자연의 순리대로. 그냥 그대로.


그러니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특별한 의미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 그 과정에서 내 영향을 받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 그들의 목마름을, 그들의 욕구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나.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 보여야만 살아남을 것 같은 이 세상에서 매일을 애쓰며 버둥거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지금 있어야 할 내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곳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비가 내게 말해주었다.


내리는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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