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일 없는 일상의 누리는 행운에 대해 -
요 며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 나만 뒤처진 것 같은 기분.
뭔가 하지 않은 것 같은 찝찝함.
외줄 타기 하듯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
사소한 일 하나도 사건화 될 것 같은 시그널.
이런 날은 유독 내 얼굴의 아주 작은 기미도, 점도 커 보인다. 두 배로.
우울한 기분만큼이나 유독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더 기분을 가라앉게 한다.
우울한 기분도 나이가 드나 보다.
유독 더 자주, 깊게 오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때는 친구와 함께 먹는 떡볶이 한 컵에도, 매콤 달콤한 학교 앞 피카추 돈가스 하나에도, 그 시절의 우상 HOT 오빠들이 노래 한 곡에도 금세 행복감이 느꼈었는데.
그때보다 두 배는 더 산 40대의 나는 딱히 위로해 줄 노래도, 영혼을 달래 줄 음식도,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다.
그저 더 차분해진 나를 억지로 끌어가며 일상을 살아갈 뿐.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그저 버티고 해 나갈 뿐.
오늘따라 한층 더 묵직해진 우울한 기분에 잠식당하던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피부과에 전화를 걸었다.
“저 기미가 많이 생긴 것 같은데 상담이나 치료받으러 가도 될까요? 예약 잡아주세요.”
무슨 결단력인지 망설임 없이 조퇴를 내고 피부과로 향했다.
피부과로 향하는 길, 학교와 학원을 마치고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이 떠올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얘들아, 엄마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한 시간만 숙제하고 있어. 엄마 병원에 금방 다녀올게.”
“엄마 어디 아파요?”
“응, 마음이.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금방 올게.”
“네.”
아이들 목소리가 유독 생기발랄한 것이 온몸의 기운을 더 빼앗아 갔다.
‘엄마가 늦게 들어온다고 하니 좋아하는 것 같네.’
“저 이 기미 없애 주세요.”
“고객님 별로 심하지 않아요. 이 정도면 자극만 주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냥 해주세요. 없애고 싶어요. 너무 커요. 실장님 레이저 이용 금액 얼마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과 신발을 사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화장품이 사고 싶어도 귀걸이가 사고 싶어도 참고 모아두었던 돈을 이곳에 결제했다. 시원하게. 고민하고 참아가며 모았던 돈이건만 이렇게 쉽게 결제하고 오다니. 그런 행동에 나조차도 놀라웠다.
‘스트레스의 무게인가?’
어느 순간 손에 들여 있는 영수증을 한참을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고객님 레이저실로 들어오세요.”
“기미는 심하지 않은데, 모공과 홍조가 좀 있어서 이 치료도 같이 해도 될까요? 좀 세게 들어갈 건데 괜찮으시죠?”
“네”
피부가 예민한 편인 나는 아주 약한 시술에도 크게 반응하는 케이스라 세게 들어간다는 말에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별일 없을 거로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힘없이.
어떠한 결정도 생각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누워 누군가가 해주는 그 어떤 것이라도 누리고 싶었다.
레이저는 정말 아팠다. 눈물이 날 정도로.
하지만 그 아픔이 오늘따라 나쁘지 않았다. 레이저의 아픔과 번쩍이는 불빛이 울어도 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아프니 울어도 돼. 울어. 너만 우는 거 아니야.’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군데군데 아픔이 남아 있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 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내 뒤로 멋들어진 배경음악이 들리는 듯했고, 거기에 맞춰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꼿꼿하게 허리가 세워졌다. 마치 성공한 40대 워킹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처럼.
‘돈 쓰는 거 나쁘지 않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아침에 눈을 떠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는데, 웬 네모난 낯선 얼굴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모공 레이저가 문제였다. 모공이 많아서 레이저를 많이 쏜 광대뼈와 턱을 중심으로 얼굴이 터질 듯 빵빵하게 부어 있었다.
식빵 맨 같았다. 순식간에 드라마 주인공에서 만화 주인공으로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게다가 얼굴은 간지럽고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성형수술 부작용을 겪는 환자 같았다. 울고 싶었다. 이렇게 부을 줄이야. 분명 빠질 부기이고 좋아지는 과정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런 내 모습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나를 위해 그렇게도 아끼고 아끼던 돈과 시간을 쓰고,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한 행동이 도리어 내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그래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출근할 때는 괜찮아지겠지.’
그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조금 사이즈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식빵 모양은 그대로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으로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지도 못한 채, 조용히 다용도실로 가 마스크를 쓰고 출근했다.
“어머 어디 아프세요?”
“네, 좀. 아프네요.”
그렇게 좋아하던 달콤한 빵과 향긋한 커피도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 못했다. 업무도 집안 일도 모두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울함이라는 괴물이 마음에 들어와 점점 갉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걸어 다닐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드는 기분. 딱 그 기분이었다. 부기는 생각보다 더디게 빠졌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식인에 인공지능에 유튜브에 하루에게 몇 차례씩 검색하고 묻기를 반복했다.
시술 4일째가 되니 다행히 부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턱 부분으로만 조금 남아 있는 상태가 되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골라 입었다. 평소에 쓰던 화장품과 옷이건만 유독 몸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데 그 느낌마저 사랑스럽다 생각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어제까지 그렇게 짜증 나던 온라인 게임 일도 집안일도 그리고 먹는 것 입는 것 등 일상의 대부분의 것들이 오늘은 아주 좋았다. 심지어 오늘따라 업무의 강도가 높았음에도 날아다니듯 몸과 마음이 움직였다.
평소에 나는 내 얼굴이 불만이었다. 남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여요. 피부가 좋아요. 칭찬하지만 정작 나는 볼살도 별로 없고 다크서클이 있다는 몇 안 되는 단점에 초점을 맞추고 불만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그런 얼굴도 다시 보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고마움을 안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고치고 싶고 바꾸고 싶던 얼굴도 다시 보니 어찌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는 진심으로 기도하고 원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상을 누리고 있는 이 건강함과 행운이 행복이더라.
나를 살게 하는 힘이고 에너지더라.
새삼 모든 것이 감사한 오늘이다.
그렇게 불만이던 얼굴아 다시 봐서 좋다.
아들들아 오늘도 버릇없는 말대꾸로 엄마 기분은 상했지만, 그래도 건강히 오늘 하루를 살다 와 줘서 고맙다.
오빠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무엇보다 큰 이벤트는 없었지만, 아무 일 없는 평온한 일상을 살게 해 줘서 내 일상의 모든 것들아 고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