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설원의 꿈

by김영교
1957년, 대관령스키장 제 1 슬로프 지르메.


“설악준령을 넘어가자. 모진 눈보라 헤쳐 가자.

빛나는 봉우리는 우리들의 사랑의 파라다이스.
스키 러너들의 즐거움은 은막 세계의 낭만이오.
스키 러너들아, 달려라 달려. 백령의 세계로!”

<스키인의 노래>


1958년, 지르메산 바로 아래에 자리한 녹산장. 그곳에는 수많은 스키어가 목이 터져라 부르는 「스키인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관령의 겨울을 이야기하면서 스키를 빼놓을 수는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관령은 단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 아니었다. 이곳은 오랜 세월 한국 스키의 역사가 시작되고 이어져 온 곳, 말 그대로 한국 스키의 고향이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직후에 닿는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원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삼방, 신풍리, 성진과 금강산 온정리의 스키장도 더 이상 자유롭게 오갈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스키를 타던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1946년 대한스키협회가 구성되면서 대한민국 스키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1947년에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남한 최초의 스키대회가 열렸다. 이후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스키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품은 대한스키협회 관계자들은 전국을 다니며 적지를 물색했다. 마침내 눈이 많이 내리고 지형 조건도 뛰어난 대관령 지르메산을 선택했다.


그렇게 대관령 제1스키장이 탄생했다.


1950년 2월 9일에는 전국동계체육대회와 선수권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약 3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개회식이 열렸고, 대관령의 하늘에는 스키대회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전쟁의 와중이었던 1951년에는 대회를 이어 갈 수 없었지만, 1953년부터 대관령에서는 다시 각종 스키대회가 꾸준히 열렸다.

그렇게 대관령은 조금씩 대한민국 스키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관령의 스키 역사는 근대스키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대관령에서는 예부터 겨울을 살아가기 위한 여러 도구가 발달했다. 설피와 썰매, 창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생활도구였다. 특히 우리 고유의 네 구멍식 전통썰매는 대관령 사람들의 겨울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이처럼 대관령에는 근대스키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눈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와 겨울문화가 축적되어 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겨울문화와 근대스키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면, 대관령의 겨울은 단순한 자연환경을 넘어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접한 기록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1955년 독일의 역사학자 C. J. 루터(Carl Josef Luther)가 저술한 고대스키역사 50년사에 "한국의 썰매는 알타이 산맥을 포함한 지역에서 유래한 스키의 원형"이며, "한국 썰매가 북동쪽으로 베링해를 넘어 북미로 전파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또한 1912년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유가와 중위가 함경도 농가에서 발견한 고대의 스키를 분석해본 결과, 놀랍게도 4세기 북유럽에서 사용한 스키와 일치하였으며, 신석기 지층에서 발견된 스키와도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세계 스키의 발상지로 세 곳이 거론되는데, 그중 한 곳이 우리나라의 대관령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었다.

C. J. Luther의 한국스키 전파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관령이 한국 스키의 중요한 역사적 터전일 뿐 아니라, 세계 스키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도 거론되는 곳이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어린 시절에는 그저 눈이 오면 스키를 타며 즐거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대관령의 역사를 알아 갈수록, 내가 누렸던 겨울이 얼마나 귀한 문화유산 위에 놓여 있었는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런 대관령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뒷동산에서 스키를 타던 기억도 결국 이 긴 역사 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당시 우리는 그것을 거창한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이 오면 스키를 탔고, 친구들과 어울려 산을 내려왔으며,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대관령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겨울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스키와 함께 살아오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그 겨울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쳐 만들어 온 소중한 역사였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대관령의 스키를 바라보는 내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스키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지역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이었고, 선배들이 남겨 준 문화였으며,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지내던 나는 1998년 2월 11일, 많은 분의 협조를 얻어 대관령 입구에 ‘한국스키 발상지’ 표석을 세웠다.


대관령을 가득 메운 눈 위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시작된 스키의 역사를 축하하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표석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었다.


수많은 선배가 이곳에서 흘렸을 땀과 열정이 떠올랐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스키를 이어 온 사람들, 대회를 만들고 선수를 키운 사람들, 눈 덮인 산에서 우리 스키의 역사를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사람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대관령은 한국 스키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 표석 앞에서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곳의 스키 전통을 어떻게 하면 다음 세대까지 이어 갈 수 있을까.’


그 질문은 훗날 내가 스키선수들을 지도하고, 지역의 아이들에게 스키를 가르치며, 대관령의 스키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스키를 가르치고, 장비를 마련해 주고, 대회를 열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 모두 작고 구체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배웠다. 한 사람의 작은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마음들이 모이면 지역의 문화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문화는 다음 세대에 전해져 역사가 된다.


내가 대관령의 스키 전통을 지키고 이어 가려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내가 누렸던 겨울의 즐거움을 다음 세대의 아이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나를 키워 준 대관령의 역사와 문화를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 가고 싶었다.


그것은 훗날 내가 ‘2042 Again PyeongChang.’을 외치게 된 가장 깊은 뿌리였다.


1930년, 개마고원 화전민들의 전통스키
1050년, 대관령에서 최초로 스키대회가 열리며 선수(엄익환)가 선수선서를 하는 모습.
1942년, 평창군 도암면(현 대관령면) 차항리 도암소학교 학생들이 전통스키를 타는 모습
1974. 2 도암중학교 스키선수단.
1960.2 전국체전을 마치고 찍은 스키협회 임원단


한국스키 100년사 편찬, 원로 스키인 좌담회 https://youtu.be/Xuz6rl_Hj8I?si=-AXKhP5GxgHTL0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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