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스키 박물관 건립에 중병이 걸렸다.

by김영교
수채화로 그린 조용한 박물관 전시관.png


1999년 1월, ‘99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 맞춰 '대관령 스키 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우리 스키의 역사, 아니 어쩌면 ‘썰매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를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한자리에 모은 공간이었다.


대관령 스키 역사관은 스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뜻이 모여 만들어 낸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오래된 사진을 내놓았고, 누군가는 평생 간직해 온 스키와 썰매를 기증했다. 또 누군가는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발품을 팔았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스키 원로 백남홍 옹과 인사를 나누던 어느 날, 나는 대관령이 한국 스키의 발상지임에도 정작 그 역사를 알릴 만한 박물관 하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 스키의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할 공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화가 작은 씨앗이 되었다.


1997년 5월, 마침내 스키 원로 백남홍, 손경석, 엄익환, 최호 선생님과 도암면 번영회 운영위원들이 뜻을 모아 ‘한국스키 발상지 조성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막연한 바람을 실제 사업으로 만들어야 하는 바카라임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세운 목표는 다섯 가지였다.

첫째, 스키 박물관 건립.

둘째, 한국스키 발상지 기념탑 세우기.

셋째, 스키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의 기념비 세우기.

넷째, 『대관령 스키 70년 사』 발간.

다섯째, 나무스키와 썰매를 특산품으로 제작하기.


하나같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스키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대관령이 간직한 겨울문화의 가치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들이었다.


우선 당시 초대 민선 평창군수였던 김용욱 군수를 찾아가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한국 스키의 역사와 발상지 조성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다행히 긍정적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강원도와 평창군을 비롯해 회장단, 스키 원로들, 추진위원들이 힘을 보태면서 원대한 계획은 비로소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박물관 건립이라는 목표를 세웠다고 해서 일이 저절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자료 수집이었다.


누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물건과 사진, 문서들은 개인에게도 소중한 추억이자 역사였기에, 박물관을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 사람씩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마음을 얻고, 간곡히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자료 수집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여러 사람이 도움을 주었지만, 실무를 맡아 자료를 찾고 정리하며 다음 일을 준비하는 과정은 대부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오래된 스키 몇 점과 사진 몇 장을 모으는 일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것은 사라져 가는 역사를 붙잡는 일이었다. 한 점이라도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박물관 개관에 꼭 필요한 분 가운데 한 분이 손경석 선생님이었다. 훗날 박물관장을 맡아 주신 분이지만, 처음부터 내 뜻에 호의적이셨던 것은 아니다.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계신 자료는 박물관을 만드는 데 더없이 귀중했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몇 번이고 댁을 찾아갔다. 열 번이 넘도록 찾아간 끝에야 마침내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아들 주형이를 데리고 손경석 선생님 댁을 방문한 적도 있다. 훌륭한 어른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그 모습을 배우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함께 가 보니 뜻밖에도 내 마음이 더 든든해졌다. 늘 혼자 감당하던 일을 누군가 곁에서 함께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손경석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학술자료와 스키 관련 자료, 사진, 썰매 등을 시작으로 수집은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김근원 선생님께서는 사진 1,000여 장을 제공해 주셨다. 그 밖에도 스키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분이라면 한 분 한 분 찾아다녔다.


나는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나머지 세 계절에는 농사와 축산업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을 미룰 수는 없었기에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쪼개고, 비가 오는 날이나 하던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봉고차를 몰고 자료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한 점 한 점 모은 자료들이 쌓여 갔다.


이제 내부 전시와 인테리어 작업만 마치면 개관할 수 있는 단계였다. 그때 뜻밖의 연락이 왔다.

관공서 관계자가 개관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개관만 해 놓고 창피를 당하지 말고, 여기서 그만둔 뒤 조금 더 준비해 제대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사실상 중도에 포기하라는 권유였다.


예산은 이미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의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통보까지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을 보태면 마무리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문턱에서 멈춰야 한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소식은 주변에도 퍼져 나갔다. 그동안 함께 애써 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쯤에서 그만두자는 이야기가 하나둘 나왔다. 모두가 지쳐 있었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분명했다. 나 역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모아 온 자료와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 집에 전시해 놓고 공무원들을 초청했다. 박물관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무엇을 모아 왔는지, 이 일을 끝까지 이어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고 싶었다. 말로만 필요성을 설명하기보다 실제 자료를 눈앞에 펼쳐 보이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한스키협회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스키연맹(FIS)과 각국 스키협회에 전문을 보내 세계 각 국의 스키 역사 관련 자료를 보내줄 것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1999년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 맞춰 박물관을 개관할 계획이라는 사실도 알리고, 세계 각국의 스키인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이제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동안 모은 자료를 제대로 전시하고, 대관령의 스키 역사를 국내외에 알리겠다는 목표 하나로 다시 힘을 모았다. 추진위원들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부족한 예산과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이어 갔다.


마침내 박물관은 문을 열었다.

1999년 동계아시아경기대회와 때를 같이한 대관령 스키 역사관 개관은 한국을 찾은 세계 각국의 스키인들과 방문객들에게 우리 스키의 역사를 보여 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개관 후 불과 일주일 사이에 5,000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왔다. 우리가 이 일을 왜 시작했는지, 그동안 왜 그렇게 애써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뿌듯한 결과였다.


개관을 앞두고 포기를 권유했던 관공서에서도 박물관이 훌륭하게 만들어졌다며 아시아경기대회를 빛내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 왔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동안의 걱정과 외로움, 막막함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창고에 잠들어 있던 물건이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었고, 오래된 사진은 잊혀 가던 시절을 되살리는 기록이 되었다. 역사는 저절로 남지 않는다. 누군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지키려 애쓸 때 비로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대관령 스키 박물관은 그렇게 여러 사람의 손길과 스키를 향한 사랑으로 세워졌다.


현재 대관령 스키 박물관은 알펜시아 스키점프센터 2층에 자리하고 있으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그곳에 전시된 스키와 썰매, 사진과 기록을 마주한다면 단순한 옛 물건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열정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그 박물관은 건물 하나가 아니다. 한국 스키의 역사를 지켜 내고 싶었던 사람들의 마음이며, 대관령에서 시작된 나의 오랜 꿈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남은 곳이다.


스키박물관 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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