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멈춤도 여행의 일부였다.

by김영교

출발 : Helsinki

도착 : Helsinki


꿈에 그리던 북유럽 여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걱정이 앞섰다.


러시아에서는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트럭 운전자들이 이용하는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핀란드는 달랐다. 숙박비가 러시아보다 열 배 가까이 비쌌고, 나는 내비게이션을 보며 길을 찾는 일에도 서툴렀다.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이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딸과 카지노톡으로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누었다. 코스를 정해 달리다가 적당한 숙소가 있으면 묵고, 그렇지 않으면 텐트를 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단 몇 시간 잠을 자기 위해 20만 원 가까운 숙박비를 쓰는 것은 내가 생각해 온 여행 방식과 맞지 않았다.


호텔 뷔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넓고 고풍스러운 식당에는 다양한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니, 잠시나마 걱정이 잊히고 행복감이 밀려왔다.


앞으로 북유럽의 올림픽 개최지를 찾아가 다시 한번 평창을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자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며 1997년 무주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심판단에서도 여섯 명 안에 드는 출발심을 맡아 첫 임원회의에 참석했다. 심판은 300여 명에 달했고, 그중 대부분은 전북 지역의 체육교사들이었다. 그런데 첫날 활강 공식 연습부터 문제가 생겼다. 선수가 내려오는 슬로프에서 심판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등 운영이 혼란스러웠다. 외국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며 비웃는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날 오후 열린 전체 임원회의에서 나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큰 국제대회에서만큼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각자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나누고 꼭 필요한 인원만 투입해 대회를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대회 운영은 점차 안정되었다. 마지막에는 외국 코치들이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함께했던 심판들도 큰 보람을 느꼈다.

겨울 유니버시아드 설원 입구.png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커피를 마시고 나니, 이제 다시 낯선 길을 향해 나설 힘이 조금씩 생기는 듯했다.

늑장을 부리다 오전 11시쯤 출발했다. 가랑비가 내렸지만 개의치 않고 페달을 밟았다. 언제 어디에서 텐트를 치게 될지 몰라 물과 빵도 넉넉히 준비했다.

미리 숙지해 둔 길을 따라 달리던 중, 부두 주변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잠시 들렀는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 보니 한국인 부부 여행객이 있었다. 박동섭 님 부부였다.


나와 동갑인 박동섭 님은 공직에서 은퇴한 뒤 지난해에는 45일, 올해는 벌써 36일째 부부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속초 출신이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은 헬싱키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 편을 타고 이틀 뒤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image.png


잠시나마 고향의 정을 느끼고 다시 E12 도로를 따라 바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전거 진입 금지 표지판이 나타났다. 다른 라이더들에게 길을 물어 우회로를 찾아보았지만, 인터넷마저 연결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으며 상황을 정리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외국어로 의사소통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풀이 죽은 채 식사를 마치고, 결국 헬싱키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간신히 헬싱키로 돌아와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가족과 운영위원들에게 상의했다.


주영이와 운영위원들은 화상회의를 열어 의견을 모았다. 60일간의 무리한 주행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에 부담이 쌓인 데다 사진으로도 비치는 야윈 모습, 결정적으로 정신적인 피로도가 누적되어 건강에 부담이 큰 만큼, 우선 귀국해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었다. 이번 여행은 당초 계획했던 세계여행의 1부로 마무리 짓고, 다음 여정은 충분히 협의한 뒤 재정비하여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이었다.


많이 아쉬웠다. 많은 사람에게 큰소리치며 출발했던 만큼 마음도 무거웠다. 하지만 이제는 욕심보다 건강이 먼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여행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멈추는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무사히 이끌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 설 날을 준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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