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 Tallinn
도착 : Helsinki
어제는 하루 종일 빵 몇 개로 끼니를 때웠다. 새벽 3시에 잠이 깼지만 이상하리만큼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가만히 앉아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보았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국가가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유심부터 새로 교체해야겠다. 러시아에서 남은 루블화도 약 47,000 루블이나 되어 유로화로 환전해야 했다. 버스에 싣기 위해 분해했던 자전거도 다시 조립해야 했다.
자전거를 분해하고 나니 들고 이동해야 할 짐이 세 개나 되었다.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자전거를 재정비하고 여행에 필요한 채비를 차근차근 갖춰야 했다. 다행히 탈린에서 헬싱키까지는 배를 타고 이동할 예정인데, 자전거를 분해하지 않고 그대로 실을 수 있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말썽을 부리던 가민도 고쳐야 할지, 새로 구입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자전거에 달 계기판도 제작해야 했다. 해야 할 일이 한꺼번에 몰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고 이후 머리가 흔들리는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다리 상태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내일이면 벌써 60일 차다. 러시아를 떠나 유럽에 들어온 만큼 이제부터는 여행의 제2막이 시작된다는 마음으로 다시 준비해 보려 한다.
아침 8시가 되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벌써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주인 부부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음식도 푸짐하게 나와 오랜만에 배부르게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주인에게 환전할 곳과 휴대폰 유심을 교체할 곳, 자전거를 조립할 수 있는 자전거점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주인은 지도에 일일이 표시해 가며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걸어서 유심을 교체하고 남은 루블화를 유로화로 환전했다. 헬싱키행 여객선 터미널의 위치도 미리 확인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가족과 나를 기다리고 계실 분들께 카지노톡으로 안부를 전했다. 이후 택시를 타고 자전거 수리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그곳은 이미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버스를 기다리던 한 젊은이가 다가와 다른 자전거점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버스요금까지 대신 내주며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잘못 들거나 필요한 곳을 찾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누군가 선뜻 나서서 도와주니 큰 힘이 되었다.
새로운 자전거점에 도착해 자전거 전체 점검을 부탁했다. 내 여행에서 자전거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벌써 약 1만 km를 달렸으니 이번 기회에 완벽하게 정비해 두고 싶었다. 직원도 많고 손님도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부품은 새것으로 교체하고 세밀한 점검까지 마치자 한결 든든했다. 친절한 서비스에 비용도 합리적이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시간이 조금 남아 여객선 터미널을 다시 둘러보고 마트에 들러 꼭 필요한 생필품도 구입했다.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히니 비로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에스토니아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친절하고 따뜻한 표정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러시아 사람들이 다소 무뚝뚝하면서도 깊은 정을 지니고 있다면,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서는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라마다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달라도, 낯선 여행자에게 건네는 친절은 어디에서나 큰 위로가 된다.
푹 쉬고 안정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러시아 구간을 56일 동안 6,022km 달리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아침 8시, 뷔페식으로 식사를 마친 뒤 서둘러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그런데 헬싱키행 배는 오후 6시에야 출발한다고 했다. 어제 터미널에 들렀을 때 배편이 많다는 말을 듣고 예약을 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하는 수 없이 표를 먼저 구입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휴대폰을 다시 점검하고 자전거 계기판도 마무리하기로 했다.
마트에서 한참을 궁리한 끝에 검은 보드판에 흰색 분필로 날짜와 누적거리 등을 적고 검은색 테이프로 테두리를 마감하기로 했다. 맥도널드에서 식사를 마친 뒤 드디어 분필로 첫 날짜와 거리를 적어 넣었다.
작은 일이지만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주영이가 파손된 휴대폰의 유심칩을 새 휴대폰에 다시 끼워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통신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에, 로밍과 이심 둘 다 준비해 왔었는데 중간에 휴대폰이 파손되면서 통신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러시아에서는 한 국가를 쭉 달리는 터라 러시아 유심칩을 구매하면 문제가 없었는데, 유럽 국가에서는 수도 없는 국경을 넘나들어야 했기에 로밍이 필수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로밍을 신청했던 유심칩이 있어야 로밍 연결이 된다고 하여 직원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데 참 어렵다.
어제 방문했던 휴대폰 매장을 다시 찾아가 직원에게 딸과 직접 통화하면서 로밍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파손된 휴대폰에서 유심칩을 제대로 옮겨 넣을 수 있었고, 로밍 부분도 확인하였다.
다만,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휴대폰 전원을 껐다 켜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직원의 설명을 여러 번 들으며 겨우 방법을 익히고 가게를 나왔다.
기계를 다루는 일은 여전히 서툴러 스스로 생각해도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배표를 구하는 일부터 자전거 정비, 휴대폰 문제까지 신기할 만큼 하나씩 풀려 나가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늘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북유럽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이제 곧 그 꿈을 이루게 된다.
앞으로는 북유럽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고, 가능하다면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지도 최대한 찾아가 볼 생각이다.
오후 4시가 넘자 승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전거 여행자는 아직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를 횡단하는 동안에도 겨우 일곱 명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으니, 생각보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승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터미널은 순식간에 북새통이 되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바로 그때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한 분이 나를 보더니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더니 자전거를 배에 싣고 별다른 검문 절차 없이 바로 승선할 수 있었다.
에스토니아 입국 때의 까다로운 절차와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배 안에서는 가족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드디어 헬싱키를 향해 출항했다.
뷔페식당에 가 보니 1인당 35유로였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음식 종류가 매우 다양했고, 특히 해산물이 풍성했다. 여유롭게 식사를 하며 발트해를 건너니 비로소 핀란드에 들어선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핀란드 헬싱키에 첫발을 내디뎠다.
북유럽의 첫 나라를 밟는 순간,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왔던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었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러시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새로운 대륙의 문을 연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호텔에 들어갔다가 말문이 막혔다. 하룻밤 숙박료가 120유로, 우리 돈으로 약 20만 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익숙해졌던 물가와는 너무도 큰 차이였다. 유럽, 그것도 북유럽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숙박비 하나만으로도 실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라이딩뿐 아니라 경비도 더욱 아끼며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북유럽 여행이라는 오랜 꿈은 이제 막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