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하수구에서 잠들고, 5성급 호텔에서 눈을 뜨다.

여행자의 길에서 인생은 종잡을 수 없다.

by김영교

출발 : Kin

도착 : Saint Petersburg


모처럼 일부러 늑장을 부려 본다.

어제 사고의 여파인지 어깨도 조금 아프고 머리가 흔들리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무리하게 자전거를 탈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시내로 들어가 버스를 이용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방향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씨 좋은 룸메이트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침대에 조금 더 누워 있었다.

그동안은 하루라도 더 멀리 가기 위해 늘 속도와 거리에만 신경을 썼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여유를 부리는 법도 배워 보려 한다.


오전 8시쯤 방 주인이 왔다. 준비를 마치고 버스터미널로 가려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전거를 버스에 실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자전거 분해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큰 고민을 던져주기에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방향의 주유소로 가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했다.


수많은 차량이 지나갔다. 혹시라도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어떤 분은 태워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피자와 차, 음료수까지 일부러 가져다주셨다. 또 어떤 분은 잘 익은 살구 다섯 개를 건네주셨다. 엊그제 하루를 제외하면 이번 여행은 늘 감사함의 연속이다.


히치하이킹을 시작한 지 세 시간쯤 되었을까.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차량이 보일 때마다 뛰어가 웃으며 부탁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셨는지, 외실리 와샤님께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가까운 곳까지 태워 주겠다고 하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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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와샤님은 다섯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운전해 주셨다. 화장실에도 한 번 들르지 않으셨고, 저녁도 간단히 해결한 뒤 다시 길을 이어 가셨다. 식사하면서 갈림길 근처 숙소에 내려 달라고 부탁드렸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숙소는 보이지 않았다.

저녁 8시.

나는 망설임 없이 외곽에 텐트를 쳤다. 이제는 누구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적당한 공간을 찾아 바로 텐트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하룻밤 머무는 곳이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가는 중이다. 오늘도 그렇게 또 하나의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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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텐트 안에 누워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본다.

누적 주행거리는 어느덧 6,000km 정도가 되었다. 왼쪽 정강이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있고, 며칠 전 사고 때문인지 오른쪽 어깨도 불편하다. 머리도 아직 흔들리는 느낌이 남아 있어 마음 놓고 움직이기 어려웠다.

에스토니아 국경까지는 약 180km 남았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해 볼 생각이다.


모처럼 아침 햇살 아래 침낭과 매트리스를 말리고 짐도 차분히 정리했다. 서두르지 않고 쉬어 가기로 했다.

러시아 비자가 만료되는 날까지는 이제 6일 남았다. 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만, 러시아 횡단 5,000km라는 목표는 이미 이루었고 남은 거리는 약 180km뿐이다.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긴다.


주유소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천사를 기다렸다.

주유소로 들어오는 기사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유난히 밝게 인사를 받아 주는 기사님이 계셨다. 조심스럽게 부탁드리니 흔쾌히 태워 주겠다고 하셨다.


또 한 명의 천사가 나타났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자신의 차량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어, 동료의 차량에 내 자전거를 함께 실어 보내 주겠다고 하셨다. 본인의 일도 아닌데 끝까지 신경 써 주시는 모습에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기사님의 이름은 드미트리였다. 열여덟 살에 징집되었고, 지금은 쉰 살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운전을 하다 보니 이제는 운전이 지겹다는 말도 웃으며 들려주었다. 차 안에서는 번역기를 이용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유쾌한 성격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전에는 핀란드까지도 자주 운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외교문제로 핀란드로 가는 길은 굳게 닫혔다고 한다.


북유럽에서 신나게 라이딩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던 나도 같은 이유로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를 경유하여 페리로 핀란드로 입성하는 경로를 선택하게 되었다.


다른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동안에는 또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젊은 여성 트럭 운전사가 멋지게 걸어와 대형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고 출발했다. 낯선 풍경 속에서 만난 당당한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곳에서 드미트리는 차고로 가야 한다며 나를 내려 주었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헤어진 후 뒤돌아보니 앞가방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한 친절한 남성분이 사무실을 안내해 주겠다며 나를 데려갔다. 비록 잘못 찾아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함께 걱정해 주는 마음이 참 고마웠다. 잠시 후 드미트리가 다시 차를 돌려 돌아왔다.


앞가방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건네주는 모습을 보는 순간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자칫하면 또다시 큰 곤란을 겪을 뻔했는데, 드미트리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직접 가방을 찾아 돌아와 준 것이다. 드미트리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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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5성급 호텔에 묵게 되었다.

어제는 주유소 옆 텐트에서 잠을 잤다. 그제는 도로공사 인부들의 숙소에서 신세를 졌고, 그 전날에는 하수구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은 5성급 호텔이라니.

여행이란 참 묘하다.


하루하루의 풍경도, 잠자리가 되는 곳도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간다. 어떤 날은 잠잘 곳을 찾아 헤매고, 어떤 날은 낯선 이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뜻밖의 호사를 누린다.


하지만 어떤 모습이든,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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