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아주지 않으시면,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

군 생활의 시작

by김상욱

지금이나 그때나 UDT는 지원한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처음 그곳에 지원해서 갔었을 때는, 체력 테스트(푸시업, 턱걸이, 달리기, 수영), 그리고 챔버 테스트, 대면 면접을 통과해야 비로소 UDT 교육생이 될 자격을 얻었다.

체력테스트에서는 운이 좋게도 100점 만점에 95점을 받고 통과했고, 다른 테스트들도 모두 통과하고 면접만이 남아있었다. 테스트 당시, 특별했던 질문이나 그런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면접을 마칠 때쯤 한마디만 해도 되겠냐고 묻고, 흔쾌히 승낙해 주시던 면접관 님들께 내가 했던 나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저를 뽑아주지 않으신다면, 제 오른쪽에 있는 저 바다 쪽으로 우향우해서 그대로 빠져 죽겠습니다"


정확히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도 도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내가 읽었던 바카라에서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만드신 고 박태준 회장님의 전기를 보면 '우향우 정신'이란 말을 보고 영감 받았던 게 아닐까 싶다.

박태준 평전

우향우 정신이란, 6.25 전쟁 이후 1970년대 가난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어렵게 돈을 빌려, 제철소를 건설할때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 제철소 건립을 맡으신 박태준 회장님께서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공사장에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 제철소를 짓는 돈이 어떤 돈인지 아는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받은 돈이다. 만약 우리가 이 제철소를 실패한다면, 우리는 역사와 조상 앞에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모두 '우향우'해서 저 영일만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야 한다!"


그만큼 필사적이었던 그때 그 회장님의 마음.

그 바카라을 읽으면서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는 그런 마음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져서 그런 말을 했었다.

그것을 들으신 면접관님들은 어처구니가 없으셨는지 허허 웃으셨고, 제일 연장자로 보이시는 면접관님께서 "그럼 죽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나는 그 말씀을 듣고 순간 의자를 빼고 달려 나가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그런 각오로 지원했다는 나의 마음이 전해졌던 걸까.

2013년 11월. 나는 최종적으로 UDT 훈련병을 받을 수 있는 면접에 합격했다.


훈련생에 합격했다고 마치 내가 UDT에 합격한 것처럼 하고 다니진 않았다. 그곳에 합격하고 나서도 집과 체육관을 오가면서 운동만 했고, 또 특별했던 건, 정기적으로 근처 지역아동센터에 가서 봉사활동 기억이 난다.

아이들에게 수학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 UDT에 붙고나서 이 아이들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또 집구석에서 게으르게 가만히 있는 모습을 못 보셨던 어머니께서는 막노동이라도 뛰라고 하셨고, 시간이 나면 상하차 아르바이트도 했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단 한 번도 추노 한 적이 없었다.

너무너무 힘들어서 식판에 미친듯이 퍼서 많이 먹었던 기억. 나도 어이가 없어서 사진까지 찍어놨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동네 수영장에 가서 수영강습을 한두 번 정도 받으면 수영을 했던 정도였다(하지만, 한두 번 받는다고 달라지지는 않았다. 초짜는 초짜였다)

그리고 다가온 2014년 2월. 나는 부모님과 함께 2-3일 정도 여행을 하고 진해로 가서 일반 해군 교육부터 받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너무 낯설었다. 운이 좋은건지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60-70명 정도 있는 우리 소대에서 나는 소대장 훈련병을 하게 되었다. 쉽게 얘기해서 반장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만한 리더십을 가지지 못했었다. 나 하나 챙기기에도 힘들었던 시절, 소대장 훈련병이라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그 자리는 나에게는 너무 버거웠다(리더십은 잘 모르겠고, 친했던 동기들과 나눠 먹기 위해 초코파이 몰래 몇 개 더 가져가다가 걸려서 소대원들 보는 앞에서 엎드려뻗쳐 기합 받은 기억은 난다) 하지만, 부족한 나를 믿어주고 도와주는 소대원들 덕분에 나는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다. 5주 차 마지막 행군 때에는 퍼진 동기를 부축해 주며, 총과 군장을 대신 메고 올라가 줬던 기억이 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몸으로 때우든지 어떻게든 해나갔다. 그 당시 우리 소대원들이 나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을 텐데,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고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다.


약 5주 정도 되는 그 시간에는 나 말고도 다른 UDT 훈련병들도 있었다. 물론 다른 동기들과도 모두 친했지만, 앞으로 고된 훈련을 같이 겪어야 된다는 공포심? 때문이랄까 빠르게 UDT 훈련병들과 가까워졌던 기억이 난다.

참 신기했다. 슬롯에서는 줘도 안 먹던 초코파이나, 크림블같은 과자들이 너무 맛있게 느껴졌고, 종교가 없던 사람들까지 과자 때문에 종교활동에 갔었다는게 참 재미있었다(그렇게 그곳에서 숨겨서 가져온 초코파이를 천장에 있는 구멍에 넣어놨다가 밤마다 몰래 먹던 기억이 난다. 또

기독교에서, 천주교에서, 불교에서 무엇을 주느냐에 따라서 훈련생들의 종교는 매주 바뀌었다)


그렇게 5주의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UDT 교육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3월 중순쯤에 일반 해군 병 교육이 마쳤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반나절의 휴식을 갖고 나서 다시 모여 전입받은 곳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렇게 UDT 교육훈련대대에 들어갔었다.

뭔가 엄청 살벌한 분위기. 하지만, 생각 외로 교관님들은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알고 보니, 정식교육은 3월 31일부터 시작이라, 그전까지는 가입교라고 해서 조금의 적응할 시간을 주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교관들은 따뜻하게 우리를 대우해 주었다. 수영기초 훈련을 시켜주고, 외워야 할 UDT 체조등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1-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식 입교 전날인 3/30 밤이었다.

평소 같으면 별말씀 안 하시던 신사 같으신 교관님께서 뭔가를 잘못한 우리를 총집합시키셨다. 당연히 큰 잘못은 아니기에, 별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우리는 야외로 모였고 그곳에서 바뀐 교관의 첫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모인 그곳에서 교관님도 어떠한 잘못을 짚어주시면서 짧게 '입수'라고 하셨다(입수라고 말씀하시면 근처 딥탱크(물탱크)에 몸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시고 나와야 한다)

아래 사진들은 실제 당시 내가 있었을 때의 사진이다.

딥탱크(물탱크)
당시 단체 기합으로 운동장바닥에 굴러서 흙먼지가 온몸을 덮은 모습. 우리는 이 상태를 '인절미'라고 했다.
정신없이 구르고, 인절미가 되고나서 가는 곳. 가입교때까지만해도 내가 이곳을 집처럼 드나들줄은 몰랐다.

그 당시 체육복을 입고 있던 상황인데, 그 말을 들은 그 교육생은 체육복을 벗지도 않고, 운동화도 신은 그대로 그 말을 듣자마자 1초 만에 100m 정도 거리에 있던 흙탕물이었던 물탱크에 달려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물에 젖은 생쥐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셔지고 와서 완전히 기죽은 상태로 있는 그 교육생을 보니 나도 모르게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때 느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그 친구도 바뀐 교관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던걸까. 한밤중 입수했던 그 친구는 그날 바로 종 치고 퇴교를 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의지로 포기한 것이다.


그때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P.S 격투기 시합이10/9이라, 그때까지 시합에 집중하고, 시합 이기고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연재는 잠시 중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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