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

어쨋든 그래도 한다.

by김상욱

2026년 10/9, 한글날의 일기


지금 아니면 쓸 수 없는 일.

시합 때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시합할까.

시합이 한 달이 남았을 때.

일주일이 남았을 때.

계체량 하루 남았을 때

계체량이 끝났을 때.

시합이 한 시간, 10분 남았을 때

매 순간 드는 생각이 달라진다.


시합이 한 달 남았을 때는 그냥 살짝 먼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내 시합 같지는 않고,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 느낌. 뭔가 현실부정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한 달 뒤에 싸운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매일 밤에 싸우는 상상을 하면, 잠자리 속에서 매번 손에 땀을 쥔다.


시합이 일주일 남았을 때는 우선 잠이 안 온다.

우선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온다. 시합이 일주일 남았을 때 보통 10kg 조금 안되게 남는데, 시합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보다는 몸무게를 못 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상상부터 시작하게 된다. 식탐이 많아서 그런지 일주일 전부터 굶주린 배를 붙잡고 잠을 청한다. 몸무게에 대한 고민은 결국 끝나긴 한다. 나도 내 몸무게를 빼지만, 내가 아니라 관장님께서 함께해 주시기에 몸무게를 빼다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 계체 실패는 없다고 생각하며 걱정을 잠재우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면 내가 이기는 상상보다는 KO 당하는 생각이 든다. 무섭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면, 아무리 일찍 자도 잠을 설치다가 3시간 4시간 밖에 못 잔다.

계체 일주일전

계체량이 하루 남았을 때는 시합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로지 배고프다. 목마르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유독 더 그런 것 같다. 수분감량할 때 그 고통을 어떻게 버티지. 걱정이 밀려온다. 그리고 막상 수분감량을 할 때는 "아, 다음 시합은 못 뛰겠다, 이걸 또 어떻게 하냐"라는 생각이 든다. 수만 번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요새는 관장님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 하지만, 나중에는 그리워할 시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듣고 나면 고통을 잘근잘근 씹어먹는 느낌으로 그 고통의 시간을 외면하기보다는 온전히 느끼려고 한다.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언젠간 그리워할 순간이 오기에.


계체 하루전

계체량이 끝났을 때는 마냥 기쁘다.

마치 천국에 온 것과도 같다. 계체 이후 두 시간 정도는 상대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 없다.

오로지 먹어서 행복하다. 그렇게 먹으면 이런 생각

이 든다. 인간의 삼대욕구 중에 나는 식욕이 1등이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뱃속이 어느 정도 음식물이 가득 차있을 때쯤, 상상이 시작된다. 이기는 상상, 지는 상상. 하지만, 신기하게도, 잠은 잘 온다. 한 달간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는 느낌이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똑같다. 이 레퍼토리.


시합이 한 시간이 남았을 때는 빨리 싸우고 싶다.

빨리 싸우고 끝내고 싶다. 빨리 싸우고, 이 부담감을 떨쳐내고 싶다.


하지만, 시합이 20분 남았을 때. 시합장에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어떤 마음이라고 얘기해야 될까.

물론, 여러 마음이 공존하지만, 20분 전쯤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느낌이다.

매번 똑같다.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Ko 당하는 상상이 든다.

가끔은, 내가 누구인지도 까먹고,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하늘이 나의 싸움을 막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겁쟁이라서 도망친 게 아니니까.

시합 20분 전

하지만, 10분쯤 남았을 때 마음이 바뀐다.

도망칠 수 있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나는 무섭지만, 도망치지 않는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시합에 임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때부터 전략이 제대로 몸에 들어오고, 머리에 들어온다. 본능 안에 연습했던 전략이 들어온다.

전장의 북소리와 같은 관장님의 말씀아래

무서움은 용기와 자신감으로 바뀐다.

긴장감은 차분함으로 바뀐다.

전쟁에 나가는 준비가 끝나는 장수의 마음이 된다.

준비가 되었다.


"OK. 죽일 테면 죽여봐라.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8화뽑아주지 않으시면,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