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변기를 바카라상삼아 했던 공부

격투기의 첫 시작

by김상욱

재수, 군대, UDT 도전기 및 진로 고민
201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정말 하루 종일 체육관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쯤, 다니던 복싱장 옆에 격투기 체육관이 생겼었다. 강동구 명일동의 SMK 체육관, 궁금해서 들어간 그곳. 그곳에서 나도 모르게 나의 꿈은 시작되었다.
다니던 복싱장을 그만두고 가기에는 뭔가 복싱장 관장님을 배신하는 느낌이 들어서 복싱과 격투기 도장을 동시에 다니면서 관비를 납부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웃긴 건 내가 두 곳을 동시에 다니는 것을 두 관장님 모두 모르게 했다는 것이다(사실 두 분 다 아셨지만, 모른 척하셨던 것이었다)

하루에 체육관을 두 곳이나 가니, 공부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체육관 끝나면 11시, 12시였다(복싱장에서 만난 아저씨들께서 너무 자상하게 잘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의 첫 격투기 체육관의 관장님께서도 정말 엄하셨지만, 선수도 아니었던 나를 너무나도 성심성의껏 봐주셨던 기억이 난다. 정말 많이 감사하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고3이 되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충 했다. 결과는 재수였다.
사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게임(워크래프트 카오스)에 정신이 팔려서 공부를 열심히 못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지금은 하려면 누가 말리는 사람도 없으니 무한정으로 할 수 있지만, 그래서인지 재미가 없어 오래 할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누군가 말리거나 못하게 했기에, 그래서 재미있었던거 같다.

어쨌거나 부모님께 사정사정을 한 나는 그렇게 광주에 있는 등용문 기숙학원에 들어가서 재수를 시작했다. 부모님께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
기숙학원은 돈이 어마무시하게 들어갔다. 그곳의 일상은 밥, 잠, 공부 셋 뿐이라 너무나도 단순했지만, 문제는 등하교뿐 아니라 잠까지 잔다는 것에서 일반 학원과는 차원이 다른 돈이 들어갔다. 사실상 군대였다. 부모님 두 분이 공무원이셔서 그 큰돈을 충당하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충당해 주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 당시에는 내가 감사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렇게 돌이켜보면 나는 감사함을 몰랐다.
돈을 벌어본 지금에서야 얼마나 힘든 걸 해주신 건지 조금이나마 더 이해 가고 감사하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과연, 우리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한 만큼 나도 자식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내가 아직 자식을 키워보지 못해서 단정할 수 없지만, 나는 아직까지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 돌이켜보면 재수 당시에 열심히 했다. 공부가 잘 되든 안 되든 매일 공부했고, 심지어는 기숙학원 소등을 하고 나서는 화장실 구석 변기 칸 에 앉아서 쭈그리고 공부하기도 했다. 내가 단지 공부를 그냥 열심히 했다면, 기억에 남는 재수의 추억은 없었을 것이다.
조금 더 설명을 해보자면, 기숙학원은 소등시간이 밤 11시쯤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때 이후로는 절대 불을 켤 수조차 없었는데, 어떻게든 조금 더 공부하기 위해 조용히 화장실 변기칸에 들어가 화장실 바닥을 의자 삼고 변기뚜껑을 바카라상 삼아서 공부했다. 집중력이 부족한 나는 앉아만 있었던 적도 많았고, 정신이 멀쩡한 낮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하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그래도 그때 엉덩이 붙이고 있던 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해야 할 무엇이 생기면 꾸준하게 한다) 잘 나오지 않는 모의고사 성적표 때문에 힘들어하고, 가끔 스트레스 풀 때 했던 족구까지. 모든 것들이 나에겐 나의 추억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게 재수하 고나니 1년이 금방 지나갔고 내가 받아들인 수능 성적표는 국어4 수학1 영어4 탐구 2, 5였다. 그랬다. 딱 노력한 만큼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수학을 재미있어해서 수학을 계속 풀었고 모의고사에서는 3등급이 나왔지만 시험에서는 운 좋게 1등급에 턱걸이를 할 수 있었고, 탐구 과목이었던 근현대사도 좋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한 덕에 2 등급이 나왔다. 하지만, 나머지는 열심히만 했지,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조금 알았던 거 같다. 잘해야지 재미있는 거구나.
그래도 이 정도라도 지금의 영어 실력을 갖춘 것은 그 당시 단어라도 많이 외워둔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점수에 맞춘 대학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 학생들이 그렇듯 취업이 잘 되는 가천대학교 전기공학과에 가게 되었다. 재수까지 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대학교에 가게 되었지만, 나는 생기를 잃어갔다. 학교를 너무나도 가기 싫었다. 나의 꿈이 뭔지도 모르고 진학한 결과였다. 재수학원을 다닐 때는 대학교라는 목표를 가지고라도 있었지만, 재수가 끝나고 나서는 그것조차 없어졌으니, 잠깐동안 무기력증에 빠졌던 거 같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거의 혼자 다녔고 밥도 혼자 먹었다. 하지만, 그때쯤 다시 격투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혼자 먹는 밥이 쪽팔리지는 않았다. 격투기 때문일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의 존재 이유를 격투기에서 찾아서 그럴 수 있었다.
약한 사람들은 뭉쳐 다닌다고 생각했고, 나는 나만의 길을 가기에, 혼자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양 떼나 사슴들은 뭉쳐 다니지만, 호랑이는 홀로 다니듯.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격투기 한다는 뽕에 차서 가오가 나를 지배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내가 그때 만약 격투기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몰려다니면서 내가 누군지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이유로 격투기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강해지고 싶다는 것.
대학교 때도 똑같았다. 학교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체육관에서 보냈다. 그래도 그 시간이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당시를 잠시 회상해 보면 선수도 아닌 우리를 거의 새벽 두 시까지 관장님께서 지도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뜨거우셨던 분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킥복싱 시합에 나가면 다 같이 따라가서 케어해 주시고 항상 최선을 다해 엄격하게 지도해 주셨다. 정말 무서우신 분이셨지만 잘 지도해 주셨다. 체육관 생활을 오래 하면서 관장을 잠시 해봤지만, 나의 첫 스승님처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당시에는 "왜 이렇게 엄격하실까? "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가끔은 원망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감사했던 경험이었다. 선수를 지망하는 것이 아닌 일개 대학생에게 그런 사랑과 지도를 해주신다는 것에.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군대 갈 때가 되었다. 당시에 나는 가슴속에 로망이 있었다. 막연한 애국심이었던 거 같다. 비록 짧은 군생활이지만 군복무하는 그 순간만큼은 나라를 위해 뜨겁게 몸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에 도움이 되기 위해 가는 , 이력을 쌓기 위해 가는 군대가 아니라, 내 한 몸을 정말 뜨겁게 불사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강함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재수 때 나빠진 시력 때문에 안경을 썼었는데, 군대에 가기 위해 라섹도 했다. 신검 2급을 받은 것이 부끄러워서, 숨기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그 당시, 구체적이지 않던 나의 두루뭉술한 애국심을 확립시켜 주신 분은 재수학원 때 만난 박세니 선생님이시다. 그분 덕에 두루뭉술했던 나의 애국심이 가득 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애국심이 없다면, 난 더 큰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이 길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우리나라를 밝힌다고 생각한다. 비록 얼마나 밝힐지는 몰라도,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는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다.
내가 나의 인생과 내 꿈을 포기해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까지 꺾이게 할 수없다)

그리고, 대학교1학년이 끝날 때쯤,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과 애국심, 이 둘이 합쳐지자 내가 가야 할 곳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곳은 해군 UDT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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