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맡겨둔 것들

장례를 치르고 처음 출근하는 날 아침, 그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맸다. 거울 테두리에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이 끼워져 있었다. 어머니 방을 정리하던 날 챙겨 온 뒤로, 어디에 둘지 정하지 못한 채 며칠째 그 자리에 두고 있었다. 지갑에 넣는 것도, 서랍 깊숙이 넣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넥타이를 매다 보면 그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매듭을 다 지은 뒤에도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카드 모서리를 반듯하게 고쳐 끼우고 방을 나섰다.

*

사무실 바카라상 위에는 하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팀원들이 돌려 쓴 위로 카드였다. 짧은 글귀들이 서로 다른 펜 색으로 적혀 있었다. 그는 카드를 끝까지 읽고 봉투에 도로 넣었다.

점심 무렵, 그는 바카라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류 더미 밑에 누렇게 바랜 사보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십여 년 전, 그가 따낸 계약이 사내 우수사례로 실리던 달의 것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지금보다 머리숱이 많았고,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소매로 먼지를 한 번 훔쳤다. 그리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이번에는 서류 밑이 아니라 맨 위에 올려두었다.

오후에 후배가 서류철을 들고 그의 자리로 왔다. 장례식장에 혼자 찾아왔던 그 후배였다. “선배님, 바쁘신데 죄송한데요. 이거 한 번만 봐주실 수 있으세요?” 신규 거래처와의 계약서 초안이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한 장씩 넘겼다. 세 번째 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납기를 넘겼을 때의 바카라임이 한쪽에만 걸려 있었다.

“여기, 이 조항.” 그가 볼펜 끝으로 짚었다. “이대로 가면 나중에 우리가 다 떠안아.” 후배가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걸 놓쳤네요. 고맙습니다.” 후배가 돌아간 뒤에도 그는 볼펜을 쥔 채 한동안 앉아 있었다. 몇 해 전 이 후배에게 계약서 읽는 법을 가르치던 오후가 떠올랐다. 그는 볼펜을 필통에 꽂고 다시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퇴근 무렵 후배가 다시 그의 자리에 들렀다. “선배님, 내일 점심 같이 하실래요? 거래처 건도 좀 더 여쭤보고 싶어서요.” 그는 잠깐 후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러지.” 후배가 자리로 돌아가자, 그는 바카라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평소보다 반듯하게 정리하고 일어났다.

*

퇴근길, 그는 마트 앞을 그냥 지나쳤다. 유리문 너머 계산대에 그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그날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밤늦게 물을 마시러 나왔을 때,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들이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뒷모습이었다. 아들은 그릇을 하나씩 헹궈 건조대에 엎었다. 서툰 손놀림이었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는 말을 걸지 않고 물만 한 컵 따라 마신 뒤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출근한 지 사흘째 되던 저녁에야 그는 마트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여자가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안 오셨네요.” 그는 담배 이름을 말하며 지갑을 꺼냈다.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요.”

여자의 손이 멈췄다. “아, 그러셨구나.” 여자는 담배를 봉지에 넣고 나서, 계산대 옆 온장고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 함께 넣었다. “이건 그냥 드릴게요. 날이 차서요.” 그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봉지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 말이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여자의 가슴에 단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거기 적힌 이름을 읽기 전에 시선을 내렸다.

마트를 나와 걸으며, 그는 봉지에서 캔커피를 꺼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그는 캔을 따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닿을 때까지 손을 주머니에서 빼지 않았다.

*

현관문을 열자 된장 끓는 냄새가 났다. 신발을 벗다가 그는 현관 한쪽에 나란히 놓인 슬리퍼 두 켤레를 보았다. 하나는 새것이었고, 하나는 밑창이 다 닳아 있었다. 둘 다 어머니의 것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부엌에서 아내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아내의 허리에 꽃무늬가 다 바랜 앞치마가 묶여 있었다. 어머니가 늘 두르던 앞치마였다. 그는 부엌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내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왔어? 금방 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코트를 벗었다.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미지근했다. “이거 마셔.” 아내가 캔을 보더니 그를 쳐다보았다. “웬 거야?” “그냥.” 아내는 더 묻지 않고 캔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국자를 들었다.

잠자리에 누워 불을 끈 뒤, 아내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어머님 앞치마, 내가 써도 되겠지?” 그는 잠깐 대답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아내의 허리에 묶여 있던 꽃무늬가 떠올랐다. “응. 그래.” 아내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누웠다. 그는 한동안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

토요일 새벽, 그는 알람 없이 네 시 반에 눈을 떴다. 몇 년째 몸에 붙은 시간이었다. 현관 옆에 늘 세워두던 낚싯대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빈자리를 보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강가에는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날 앉았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낚시터 입구의 관리인이 그를 알아보고 컨테이너 안에서 낚싯대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거 찾으러 오셨죠? 며칠을 그대로 걸려 있길래 맡아뒀어요.” 줄은 엉켜 있었고 찌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낚싯대를 받아 들었다.

그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낚싯대는 무릎 옆에 눕혀두었다. 줄을 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대를 물었다. 불을 붙이자 “날이 차서요” 하던 목소리가 연기 사이로 스쳤다. 그는 그 담배를 끝까지 다 피웠다. 안개가 걷히는 동안 그는 흘러가는 물만 바라보았다. 해가 강 건너 지붕들 위로 올라오자, 그는 낚싯대를 챙겨 일어났다.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이른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마트 앞을 지났다. 아침 일곱 시, 유리문에는 셔터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불 꺼진 계산대가 셔터 아래로 보였다.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갔다.

*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놀란 얼굴로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벌써 왔어?” “응. 밥 있어?” 아내는 대답 대신 밥솥을 열었다. 주말 아침을 둘이서 함께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앉던 의자는 비어 있었다. 둘은 그 의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방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아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아들은 식탁을 한 번 둘러보다가, 어머니가 앉던 의자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내가 밥을 한 공기 더 펐다. 셋이서 먹는 아침이었다.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숟가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찌개 맛이 어머니 것과는 조금 달랐다. 간이 약간 싱거웠다. 그는 그 말은 하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내가 빈 그릇을 보더니 말없이 찌개를 한 국자 더 떠주었다.

*

오후 내내 그는 베란다에 앉아 엉킨 낚싯줄을 풀었다. 매듭 하나를 푸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등 뒤 베란다 구석에는 먼지 앉은 기타 케이스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줄은 다 풀렸다. 그는 낚싯대를 현관 옆 원래 자리에 세워두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4화14장. 통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