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통화 목록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아침, 그녀는 옷장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거울은 한 번만 보았다. 머리를 대충 묶고 집을 나섰다.

본가에 도착한 건 열 시쯤이었다. 할머니 방을 정리하기로 한 날이었다. 현관에는 할머니의 슬리퍼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밟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신발을 벗었다.

할머니 방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이불은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고, 머리맡에는 돋보기와 탁상 달력이 놓여 있었다. 달력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경로당 가는 날, 반찬 하는 날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생일에도 작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엄마는 옷장 앞에 앉아 옷을 하나씩 꺼내 접었다. 방바닥에는 ‘남길 것’과 ‘보낼 것’을 나눌 상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아빠는 서랍에서 통장과 서류를 꺼내 식탁으로 옮겼고, 오빠는 빈 상자를 테이프로 조립했다.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테이프 뜯는 소리만 방 안을 오갔다.

엄마가 옷장에서 회색 카디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팔꿈치가 조금 해진 카디건이었다. 엄마는 그것을 한참 들고 있다가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너 입을래?” 그녀는 말없이 받아 들고 어깨에 걸쳐보았다. 소매가 손목 위로 짧게 올라왔다. 섬유유연제 냄새 사이로 할머니 방 냄새가 났다. 그녀는 카디건을 벗어 곱게 접어 자기 가방 옆에 두었다.

옷장 안쪽에서 밑창이 다 닳은 슬리퍼 한 켤레가 나왔다. 오빠가 그것을 들고 잠깐 서 있었다. 새 슬리퍼를 받은 뒤에도 할머니는 헌 것을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빠는 그 슬리퍼를 ‘보낼 것’ 상자에 넣으려다, 상자 옆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

엄마가 그녀에게 할머니의 핸드폰을 건넸다. 오래된 폴더폰이었다. “경로당 분들한테 연락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번호 좀 찾아봐줄래?” 그녀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할머니 침대 끝에 앉았다.

전화번호부에는 이름이 몇 개 없었다. 경로당 회장, 반찬가게, 아범, 어멈, 손주. 그 사이에 ‘강아지’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녀의 번호였다.

통화 목록을 열었다. 화면을 내릴 때마다 같은 이름이 나왔다. 강아지, 발신. 강아지, 발신. 통화 시간은 대부분 0초였다. 날짜를 거슬러 올라가도 목록은 비슷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저녁 일곱 시 무렵. 그녀가 퇴근길 지하철에 있거나, 친구들과 저녁을 먹거나,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두었을 시간이었다.

목록 한가운데에 한 줄만 달랐다. 강아지, 수신, 2분 58초. 지하철에서 그녀가 걸었던 그 전화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 줄에서 멈췄다. 얼마 뒤에야 그녀는 경로당 회장의 번호를 찾아 종이에 옮겨 적었다. 글씨가 자꾸 비뚤어졌다.

그녀는 자기 핸드폰을 꺼내 통화 목록을 열어보았다. 할머니라는 이름은 한참을 내려가야 나왔다. 발신, 2분 58초. 그 한 줄 뿐이었다.

*

베란다로 나가 경로당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나서 나이 든 목소리가 받았다. 사정을 전하자, 수화기 넘어가 한동안 조용했다. “그 양반이 손녀 자랑을 그렇게 했는데. 서울서 큰 회사 다닌다고, 바빠서 통 못 본다고.” 그녀는 네, 네, 하고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도 그녀는 베란다 난간을 잡은 채 오래 서 있었다.

*

점심 무렵 지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번 주말에 우리 엄마가 같이 저녁 먹재. 결혼 얘기도 좀 하고 싶으신가 봐.” 예전 같으면 곧바로 좋다고 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입고 갈지부터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는 방 안에 쌓인 상자들을 한번 둘러보고 답장을 보냈다. “이번 주는 안 될 것 같아.”

보내고 나서도 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호네 집에 안 된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답장은 금방 왔다. “그래, 알겠어. 괜찮아?” 그녀는 괜찮다고 쓰려다가 지우고,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

점심은 식탁에서 먹었다. 엄마가 수저를 놓다가 손을 멈췄다. 식탁 위에는 수저가 다섯 벌 놓여 있었다. 엄마는 한 벌을 조용히 거둬 서랍에 넣었다. 아무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늘 앉던 의자는 비어 있었고, 네 사람은 그 의자를 비워둔 채 둘러앉았다. 오빠가 단무지 그릇을 그녀 쪽으로 조금 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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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오빠와 둘이서 상자에 테이프를 붙였다. 한동안 테이프 소리만 나다가, 오빠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너 저번에 할머니한테 전화했었다며.” “응.” “그날 저녁에 할머니가 반찬을 하나 더 하셨어. 아무 날도 아닌데.” 그녀는 테이프를 자르던 손을 멈췄다. 오빠는 더 말하지 않고 다음 상자를 끌어당겼다.

*

화장대 맨 아래 서랍에서 낡은 과자 상자가 나왔다. 뚜껑을 열자 사진이 몇 장 들어 있었다. 대부분 그녀와 오빠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입학식, 운동회, 명절에 찍은 사진들. 할머니가 찍힌 사진은 거의 없었다. 사진을 찍는 쪽은 늘 할머니였다.

맨 밑에서 그 사진이 나왔다. 시골 마당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활짝 웃는 어린 그녀. 얼마 전 핸드폰 앨범 맨 위로 옮겨둔 그 사진의 원본이었다. 뒷면에는 연필로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우리 강아지’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뒤집어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른 사진들과 함께 상자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남길 것’ 쪽으로 옮겼다.

*

오후 늦게, 그녀는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나왔다가 걸음을 멈췄다. 엄마가 부엌 벽 고리에 걸려 있던 할머니의 앞치마를 내리고 있었다. 꽃무늬가 다 바랜 앞치마였다. 엄마는 그것을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쳐 털었다. 그러고는 도로 고리에 걸었다. 엄마는 그녀가 보고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열린 문틈으로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할머니 침대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이 들려 있었다. 영정 사진과 같은 얼굴이었다. 아빠는 그것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

해가 질 무렵 정리가 끝났다. 할머니 방에는 상자 몇 개와 빈 옷장만 남았다. 핸드폰은 다음 주에 해지하기로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 핸드폰, 내가 가져가도 돼?” 엄마가 그녀를 잠깐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서랍을 뒤져 충전기를 찾아 건넸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며 그녀는 슬리퍼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새 슬리퍼 옆에, 오빠가 꺼내 온 헌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취방에 돌아와, 그녀는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핸드폰을 열자 지난번에 올린 사진에 달린 ‘좋아요’ 알림이 몇 개 와 있었다. 그녀는 알림을 열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의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았다. 작은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통화 목록을 다시 열지 않았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핸드폰을 머리맡에 올려두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충전 표시등이 한동안 깜빡였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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