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출근하고 아들도 나가자 집 안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식탁에 남은 그릇들을 개수대에 담고 부엌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시어머니가 쓰던 양념통들이 늘 놓이던 자리에 줄지어 있었다. 고춧가루, 깨소금, 간장. 통마다 시어머니 글씨로 이름이 적힌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벽 고리에는 꽃무늬가 바랜 앞치마가 걸려 있었다. 지난 토요일, 그녀는 그것을 상자에 넣으려다 도로 걸어두었다. 그녀는 잠시 그 앞치마를 바라보다가 고리에서 내렸다. 목에 걸고 끈을 뒤로 돌렸다. 손이 등 뒤에서 몇 번 헛돌았다. 시집와서 처음 몇 해 동안은 이 끈을 시어머니가 묶어주곤 했다. 그녀는 거울도 없이 더듬어 매듭을 지었다. 조금 비뚤어졌지만 풀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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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방에서 가져온 탁상 달력을 그녀는 부엌 창가에 세워두었다. 달력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일주일의 순서가 적혀 있었다. 화요일은 반찬 하는 날, 목요일은 경로당, 토요일은 장 보는 날. 다음 달 칸에도 같은 글씨가 미리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 글씨들을 손끝으로 한 줄씩 짚어보았다.
화요일 아침, 그녀는 달력에 적힌 대로 반찬을 만들었다. 시금치를 데치고, 멸치를 볶고, 콩나물을 무쳤다. 시어머니 옆에서 수없이 본 일이었는데, 막상 혼자 하려니 순서가 자꾸 꼬였다. 멸치는 조금 탔고, 콩나물은 간이 셌다. 그녀는 접시에 담아놓고 하나씩 맛을 보았다. 어느 것도 시어머니 맛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반찬통 뚜껑을 하나씩 닫아 냉장고에 넣었다.
그날 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례 뒤로 딸이 먼저 전화를 거는 날이 잦아졌다. “엄마, 밥은 잘 챙겨 먹어?” 그녀는 웃음이 날 뻔했다. 늘 자기가 하던 말이었다. “먹지. 오늘 반찬도 했어.” “무슨 반찬?” 그녀는 탄 멸치와 짠 콩나물 이야기를 했다. 딸이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 웃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딸이 말했다. “할머니 카디건, 의자에 걸어놨어. 아직 못 입겠더라.” 그녀는 “그래” 하고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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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남편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는데, 발소리가 부엌 문턱에서 멈췄다. 그녀는 국자를 든 채 돌아보았다. 남편이 그녀의 허리께를 보고 서 있었다. “왔어? 금방 돼.” 남편은 고개만 끄덕이고 코트를 벗었다.
남편이 주머니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거 마셔.” 그녀는 캔을 집어 들었다. 아직 미지근했다. “웬 거야?” “그냥.”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남편이 무언가를 사 들고 들어온 게 얼마 만인지 셈해보다가, 캔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다시 국자를 들었다.
그날 밤, 불을 끄고 누운 뒤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님 앞치마, 내가 써도 되겠지?” 이미 며칠째 두르고 있으면서 묻는 말이었다. 대답이 금방 오지 않았다. 그녀는 천장을 보며 기다렸다. “응. 그래.” 그녀는 돌아누웠다. 남편이 한동안 잠들지 않고 있다는 걸, 등 뒤의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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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앞치마를 두르다가 주머니 속에 무언가 단단한 게 만져졌다. 어젯밤 그 캔커피였다. 밤새 식어서 차가웠다. 그녀는 캔을 따서 부엌 창가에 섰다. 창턱에는 화분과 낡은 찻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몇 주 전 그녀가 그림으로 옮기던 바로 그 자리였다. 차가운 커피가 생각보다 달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문화센터 강사였다. “잘 지내고 계세요? 맡겨두신 그림 잘 보관하고 있어요. 편하실 때 찾으러 오세요.” 그녀는 창가에 세워둔 시어머니의 달력과 화분과 찻잔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감사해요. 조금만 더 맡아주세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그녀는 빈 캔을 헹궈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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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다. 달력에는 ‘경로당’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오후, 그녀는 화요일에 만든 반찬을 작은 통에 나눠 담아 경로당으로 갔다. 시어머니가 늘 그렇게 하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문을 열자 할머니들 몇이 화투를 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먼저 알아보았다. “며느리구먼. 그 양반이 며느리 자랑도 많이 했는데.” 할머니들은 그녀가 내민 반찬통을 열어 멸치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조금 탔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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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남편은 낚시를 갔다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다. 엉킨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고 밥솥을 열었다. 아들까지 셋이 아침상에 둘러앉았다. 시어머니의 의자는 비어 있었고, 아들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남편이 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는 걸 그녀는 곁눈으로 보았다. 그녀도 한 숟가락 떠먹어 보았다. 싱거웠다. 시어머니 찌개 맛을 떠올리며 끓였는데, 무언가 하나가 빠진 것 같았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녀는 빈 그릇을 보다가 찌개를 한 국자 더 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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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빨래를 개다가, 그녀는 거실 창 너머 베란다에 앉은 남편의 등을 보았다. 남편은 엉킨 낚싯줄을 무릎에 올려놓고 매듭을 하나씩 풀고 있었다. 그 등 뒤 구석에 먼지 앉은 기타 케이스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결혼하기 전, 남편이 그 기타를 들고 와 서툰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보리차를 한 잔 따라 베란다 문을 열고, 남편 옆에 말없이 내려놓았다. 남편은 고개를 들지 않고 고맙다는 듯 손만 한 번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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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화요일, 그녀는 싱크대 아래 넣어두었던 김치통을 꺼냈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한 조각까지 비운 뒤로, 씻어만 두고 다시 열어보지 않던 통이었다. 그녀는 빈 통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장바구니를 챙겼다. 시장에서 배추 두 포기와 무 하나를 샀다. 시어머니라면 열 포기는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배추를 절이는 데 오후가 다 갔다.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몰라 그녀는 손을 멈췄다. 그러다 손바닥에 소금을 한 줌 쥐어보았다. 옆에 서서 소금을 덜어주던 손이 이만큼 쥐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그 한 줌을 배춧잎 사이에 뿌렸다.
저녁에 아들이 퇴근해 들어오다가 부엌 바닥에 놓인 커다란 대야를 보았다. 아들은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었다. 절인 배추를 헹궈 채반에 건지는 일을 아들이 맡았다. 둘은 별말 없이 손을 움직였다. 배추를 다 건지고 나서 아들이 물었다. “할머니는 이거 혼자 다 하셨어요?” “응. 열 포기씩.” 아들은 대야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무장갑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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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양념을 버무려 통에 담고 나서, 그녀는 김치 한 조각을 찢어 입에 넣었다. 간이 조금 셌다. 시어머니 김치보다 젓갈 냄새도 진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 조각을 끝까지 씹어 삼켰다. 처음엔 다 그런 거라고, 그녀는 속으로 한 번 말해보았다. 불을 끄기 전에 그녀는 창가의 달력 앞에 섰다. 볼펜을 들고 오늘 날짜 칸을 들여다보았다. 시어머니가 미리 적어둔 ‘반찬 하는 날’ 아래에, 그녀는 작은 글씨로 ‘김치’라고 적었다. 삐뚤삐뚤한 글씨 아래 반듯한 글씨가 한 줄 놓였다. 그녀는 볼펜 뚜껑을 닫고 부엌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