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거래처 담당이 바뀌었다는 공지는 메일 한 통으로 왔다. 그의 이름은 참조에만 걸려 있었다. 담당자 이름 옆에는 그보다 열두 해쯤 늦게 입사한 후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메일을 두 번 읽었다. 딱히 항의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점심시간, 그는 후배가 팀장과 나란히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은 한 번도 초대받은 적 없는 자리였다. 그는 혼자 구내식당으로 향하며, 식판에 반찬을 담는 순서를 평소와 다르게 바꿔보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날 저녁엔 신규 거래처 계약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는 초대받지 못했지만, 팀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술잔을 든 팀장과 후배들 사이로, 낯익은 식당 간판이 보였다. 예전에 그가 직접 계약을 따내고 팀원들을 데려갔던 곳이었다. 그는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화면을 껐다.
사진 속 후배는 몇 해 전 그가 직접 가르쳤던 신입이었다. 거래처 담당자 앞에서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계약서의 어느 조항을 먼저 짚어야 하는지, 그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준 기억이 있었다. 지금 그 후배가 자신보다 앞서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딱히 억울함까지는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자신이 가르친 것들이 이제는 자신을 건너뛰고 쓰이고 있다는 현실에,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져 조금 울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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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그는 평소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마트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이었다. 그는 그 십 분을 딱히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여자가 담배 코너에서 그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가 피우는 담배 이름을 부르며 봉지에 담아주는 모습이, 몇 번의 마주침 사이 어느새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일이 좀 많았어요.” 그는 그렇게 답하며,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은 유난히 더디게 가더라고요, 하루가.”
여자는 잠깐 웃었다. “그런 날이 가끔 있죠.” 그뿐이었다. 그는 계산을 마치고 나오며 문득 걸음을 멈췄다. 방금 낯선 사람에게 하루의 기분을 말한 참이었다. 집에서는 꽤 오랫동안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하루 종일 누구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그가 무슨 담배를 피우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달달해졌다는 걸,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마트를 나서는 그의 걸음이, 들어올 때보다 조금 가벼웠다. 그는 유리문에 잠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넥타이가 반쯤 풀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고쳐 매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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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그는 다시 그 시간에 마트를 지나게 됐다. 이번엔 딱히 살 것을 정해두지 않고 들어갔다. 여자는 계산대에 없었다. 그는 진열대 사이를 몇 바퀴쯤 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몇 개를 집어 들고 다른 계산대로 갔다.
다른 계산대 직원이 그를 응대하는 내내, 그는 그녀가 오늘 쉬는 날인지 다른 시간에 일하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궁금증이 어디로도 이어질 수 없다는 것 역시,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는 굳이 그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자신이 마트에서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보았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 설명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그 자신도 분명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 감정도 다른 것들처럼 자연스레 옅어질 거라는 것을, 그는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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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부엌 쪽에서는 아직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어머니가 식탁 앞에 앉아 텔레비전 소리를 낮춰놓고 있었다. “밥은 먹었니.” “네, 대충 먹었어요.” 그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어머니는 별말 없이 다 식은 누룽지를 그릇에 담아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는 사양하려다가, 그냥 앉아서 몇 술 떠먹었다.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릇을 비우고 그는 안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아내를 불렀다. 대답이 늦게 돌아왔다. “어, 왔어.” 방문 사이로 보인 아내는 바카라상 위에 뭔가를 펼쳐놓고 있다가, 그가 다가오자 슬쩍 그 위에 다른 종이를 겹쳐 덮었다.
그는 못 본 척했다.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묻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내 역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묻지 않는 것으로 뭔가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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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 어느 저녁, 그가 먼저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기다렸다. 아홉 시가 넘어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오늘은 좀 늦었네.” 그가 말했다. “어, 수업이 좀 늘어졌어.” 아내는 그렇게만 답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그는 무슨 수업인지 묻지 않았다. 아내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며칠 전 그녀가 서둘러 덮었던 종이들이 떠올랐지만, 그는 그것과 지금의 늦은 귀가를 굳이 연결 짓지 않기로 했다. 모르는 채로 두는 편이, 그에게는 더 편했다.
저녁은 각자 먹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남은 반찬으로 늦은 밥을 먹었고, 아내는 이미 먹었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는 내내 텔레비전 소리만 거실을 채웠다.
밥을 다 먹고 그는 서재 겸 창고로 쓰는 작은 방에 들어가 바카라상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 회사에서 받은 감사패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잠깐 들여다보다가, 먼지를 닦지도 않은 채 다시 서랍에 넣고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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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마치고, 그는 베란다 구석에 세워둔 기타 케이스를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지퍼를 여니 뽀얗게 앉은 먼지가 손끝에 묻어났다. 그는 기타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가, 줄을 튕겨보지도 않고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굳이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케이스를 다시 세워두며, 그는 며칠 전 마트 앞을 지나며 흥얼거렸던 노래 제목을 떠올려보려 했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멜로디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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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안을 마친 뒤 그는 화장실 거울 앞에 잠시 섰다. 물기를 닦다 말고, 그는 거울 속 얼굴을 새삼스레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흰머리가 늘어 있었다. 낯설지 않은 얼굴인데도, 그는 그 얼굴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있었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는 수건을 걸어두고 불을 껐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아내는 이미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그는 그 옆에 조용히 몸을 눕혔다. 아내의 숨소리가 고른 걸 확인하고서야, 그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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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마트 앞을 지날 때, 그는 걸음을 잠깐 늦췄다가 다시 원래 속도로 걸었다. 유리문 안쪽에 여자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지하철에 오르며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을 다시 한번 보았다. 넥타이는 이미 단정했다. 그는 그 상태로 몇 정거장을 그냥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