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부엌 창가

문화센터 강사가 이번 학기 마지막 시간에 작은 발표회를 연다고 했을 때, 그녀는 손에 쥔 붓을 잠시 내려놓았다. “거창한 거 아니에요. 그냥 그린 것들 몇 점 벽에 걸어두는 정도예요.” 강사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녀에게는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옆자리 수강생이 물었다. “선생님도 내실 거죠?” 그녀는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글쎄요, 봐서요.” 캔버스 위로 다시 붓을 가져갔지만, 손끝의 움직임이 아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대학 시절 미술 동아리에서도 이런 자리가 있었다. 그때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냥 그리는 게 좋아서 아무 그림이나 벽에 붙이곤 했다. 지금은 그때와 손의 감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뭔가를 내보인다는 것 자체가 그때보다 훨씬 큰 일처럼 느껴졌다.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 그녀는 딱히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는 붓을 잡을 일이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누가 그만두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림은 시간이 남을 때나 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좀처럼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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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도 그 생각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바카라상 앞에 앉아 신청서 양식을 프린트해 두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름, 작품명, 간단한 소개. 빈칸은 세 개뿐인데, 그녀는 그 세 칸을 채우지 못하고 볼펜 끝으로 종이 모서리만 두드렸다.

작품명을 뭐라고 적어야 할지부터 막막했다. 그럴듯한 제목을 붙이자니 우스꽝스러웠고, 아무 제목도 없이 내자니 그것대로 허전했다. 그녀는 결국 신청서를 작성하지 못한 채 다른 종이 밑에 밀어 넣었다. 남편이 방에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을 때, 그녀는 손이 먼저 움직여 그 종이들을 덮었다. 남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아직 스스로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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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수업 날, 그녀는 결국 신청서를 내지 못한 채 학원으로 향했다. 그림을 그리는 두 시간 동안에는 그 고민이 잠시 잊혔다. 붓을 쥐고 색을 섞는 순간만큼은, 발표회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정물화 대신, 강사가 각자 그리고 싶은 걸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다. 그녀는 오래 망설이다가, 부엌 창가에 놓인 화분과 그 옆의 낡은 찻잔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매일 보는 풍경인데도, 종이 위에 옮기려니 새삼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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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침, 그녀는 시어머니가 김치통 뚜껑을 열지 못해 낑낑대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열었을 뚜껑이었다. “제가 할게요.” 그녀가 다가가 대신 열어주자, 시어머니는 “요새 힘이 없네”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그 말을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다.

며칠 뒤 저녁, 그녀는 설거지를 하다가 시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파스를 붙이는 걸 우연히 보았다. “어디 편찮으세요?” 그녀가 묻자 시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삭신이 좀 쑤셔서.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야.” 그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개수대로 돌아섰다.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이유는 그녀 자신도 분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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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딸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회사 일이 고되다는 말과 함께, 딸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그녀는 별다른 대꾸 없이 듣기만 했다. 전화를 끊기 전, 딸이 문득 물었다. “엄마는 요즘 뭐 해?” “나야 뭐, 그냥 똑같지.”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그림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통화가 끝날 때쯤 되어서야, 그녀는 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지쳐 있다는 게 느껴졌고, 무슨 일 있느냐고 되물어볼까 하다가, 그녀는 그만두었다. 딸도 자신에게 그림에 대해 묻지 않았듯이, 서로의 개인사는 깊게 묻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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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그녀는 다시 바카라상 앞에 앉아 신청서를 꺼내보았다. 볼펜을 쥐고 이번엔 별다른 고민 없이 작품명 칸에 “부엌 창가”라고 적었다. 그럴듯한 제목은 아니었지만, 있는 그대로를 적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신청서를 챙기며, 그녀는 문득 남편이 요 며칠 부쩍 자신에게 뭘 묻지 않는다는 걸 떠올렸다. “당신 요즘 자주 나가네” 하고 지나가듯 물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몇 시에 들어오든, 뭘 하고 오든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운할 법도 한데, 그녀는 오히려 그 무심함이 편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그녀에게는 요즘 조금씩 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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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수업 날, 그녀는 완성한 그림과 신청서를 챙겨 학원으로 향했다. 강사에게 그림을 건네자, 강사는 잠깐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이걸로 정하신 거예요? 왜 하필 부엌 창가예요?”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 답했다. “그냥... 제가 제일 많이 서 있는 자리라서요.”

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런 자리를 그리면, 결국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더라고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녀는 그 말에 딱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그날 하루 종일 강사의 그 말이 마음속에서 찜찜하게 맴돌았다.

신청서는 그 자리에서 강사에게 맡기고, 그림은 발표회 당일 직접 가져오기로 했다. 그녀는 그림을 다시 가방에 조심스레 넣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부엌에서는 여전히 시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그쪽으로 걸어가며, 오늘은 좀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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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회 전날 밤, 그녀는 거실 한쪽에 완성된 부엌 창가 그림을 세워두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화분과 찻잔, 그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빛. 딱히 잘 그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완성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그림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발표회가 끝나면 다시 가져와야 할 텐데, 막상 집에 걸어둘 자리는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거실 벽에는 이미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생각을 접어두고, 그림을 다시 조심스레 포장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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