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거울 앞에서 그녀는 이미 세 번째로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다. 첫 번째는 너무 캐주얼했고, 두 번째는 너무 힘준 것 같았다. 세 번째로 고른 원피스를 입고,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번엔 명절을 맞아 지호의 부모님 댁에서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라고 했다. 지호의 형 내외와 조카들까지 온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선물을 고르는 데만 며칠을 썼다. 조카들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찾느라 인터넷 쇼핑몰을 몇 시간이고 뒤졌던 것도, 지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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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의 본가는 예전에 한 번 가본 적 있었지만, 다시 가보니 그 공간의 크기에 새삼 압도됐다. 거실 한쪽 벽을 채운 바카라장,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 조용히 움직이는 가사도우미까지. 그녀가 자란 집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기가 흘렀다.
“어서 와요, 아가씨.” 지호의 형수가 그녀를 반겼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아직도 낯설었다. 그녀는 웃으며 준비해 온 선물을 건넸다. “애들 주려고 준비했어요.” “어머, 뭘 이런 걸 다.” 형수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녀는 그 말속에서 미묘한 평가의 시선을 느꼈다. 정확히 뭘 평가받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조카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모는 회사에서 뭐 해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호의 아버지가 대신 나섰다. “이모 회사에서 아주 열심히 한다더라. 요즘 젊은 사람답게 야무지지.” 칭찬이었지만, 그녀는 그 말이 어딘가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처럼 들렸다. 지호네 가족 안에서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입을 통해 소개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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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나고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동산 이야기로 옮겨갔다. 지호의 형이 최근 마련한 아파트 이야기, 그리고 지호 몫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다는 신혼집 이야기까지. 그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그 이야기들을 듣고만 있었다.
“너희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지호의 어머니가 지나가듯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과 그 준비의 절반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서로 다른 문제였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는 스스로 못마땅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호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 되게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 그녀는 “다행이다” 하고 웃었다. 마음에 든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근거로 하는 건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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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 사이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으로 흘러갔다.
“너 남자친구네 이번에 신혼집 벌써 준비됐다며. 부럽다 진짜.” 한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는 “무슨, 아직 정해진 것도 없어” 하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확히는 이미 오간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번에 신규 프로젝트도 너한테 맡겼다며. 역시 능력자야.” 다른 친구가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지” 그녀는 그렇게 답하면서도, 그 말을 굳이 강하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겸손한 웃음과 함께, 그녀는 그 칭찬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자리가 끝나갈 무렵, 친구 하나가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 진짜 다 가진 것 같다.” 그녀는 그 말에 그냥 웃었다. 뭔가 뒤가 쓴맛이 느껴지는 웃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딱히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나눴던 말들이 하나씩 다시 떠올랐다. 부인하는 척했지만 끝내 부인하지 않았던 순간들. 명치 아래가 이상하게 묵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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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그녀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우며 거울 속 얼굴을 보는데, 낮에 지었던 웃음의 잔상이 아직 얼굴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표정을 손끝으로 문질러 지우듯 클렌징 티슈를 얼굴에 문질렀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회사 단체 채팅방에 팀장이 올린 공지가 하나와 있었다. 다음 주 있을 신규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 담당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다. 언제 지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자연스럽게 그녀 몫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 액정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작 그 한숨의 이유가 일이 많아서인지, 오늘 하루가 유난히 버거웠기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구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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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오빠에게서 온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할머니 생신 며칠 전에 지나갔어. 너도 전화 한번 드려.” 그녀는 이미 한 번 “알겠다”라고 답장을 보낸 뒤였지만, 정작 전화는 걸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녀는 통화 목록을 열어 할머니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초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할머니, 나야.”
“어이구, 우리 강아지. 잘 지내니.”
“어, 잘 지내지. 할머니 생신 늦게 알아서 미안해. 다음에 갈 때 맛있는 거 사갈게.”
“됐다, 뭘. 바쁜데 신경 쓰지 마라.”
통화는 삼 분을 넘기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방금 나눈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특별히 나쁜 대화는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 정해진 대본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통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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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는 오랜만에 어릴 적 사진첩을 뒤적였다. 초등학생 때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시골 마당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때는 겁이 없었다. 뭐든 제일 먼저 해보겠다고 나서는 아이였다.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그녀는 핸드폰으로 그 사진을 다시 찍어 저장했다. 굳이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 사진을 앨범 맨 위 폴더로 옮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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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그녀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오늘 입을 옷을 고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입는 옷은 그녀에게 가장 확신이 서는 종류의 선택이었다. 거울 속 자신을 마지막으로 한 번 점검하고, 그녀는 집을 나섰다.
힘겨운 하루를 치러낸 뒤 지하철 안에서 그녀는 다시 SNS 앱을 열었다. 어젯밤 올린 사진 아래로 댓글이 몇 개 달려 있었다. “부럽다”, “역시 잘 지내는구나.” 그녀는 그 댓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고 있는 자신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하루였다.
잠들기 전 습관처럼, 그녀는 폴더 하나를 열어보았다. 몇 년 전 우연히 웹서핑 중 보게 된 사진들이었다. 지중해 어디쯤이라는 것 말고는, 정확히 어느 나라 어느 마을인지도 알지 못했다. 흰 벽과 낮은 지붕들, 그 사이로 비치는 옅은 바다색. 마음만 먹으면 검색 한 번으로 알아낼 수 있는 장소였지만, 그녀는 몇 년째 그러지 않고 있었다. 그저 언젠가,라는 말만 붙여둔 채로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