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할머니 생신

그 주는 유독 야근이 많았다. 분기 마감이 겹쳤고, 팀장은 매일 저녁 여섯 시쯤 되면 회의실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회의는 늘 삼십 분이면 끝날 것처럼 시작해서 한 시간 반을 넘겼다.

월요일부터 그런 식이었다. 그는 회의실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과 팀장의 입 모양을 번갈아 보며, 언제 자신에게 질문이 넘어올지를 가늠하는 데 절반의 신경을 썼다. 나머지 절반으로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입사 반년쯤 지나 그가 찾아낸, 가장 적게 지치는 방법이었다.

수요일 저녁, 그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현관 센서등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신발을 벗다 말고 잠시 멈췄다. 부엌 식탁 위에 낯선 것이 놓여 있었다. 작은 케이크 상자였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힐끗 무심히 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무슨 날이었던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볼 기운도 없는 늦은 귀가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넥타이를 풀고 그대로 누웠다. 잠깐 누워 쉬자 해놓고는 씻지도 못한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그는 여느 때보다 십 분 늦게 일어났다. 부엌에서는 미역국 냄새가 났다. 그는 식탁 의자에 앉아 국을 뜨다가, 문득 어제 본 케이크 상자를 떠올렸다.

“어제 케이크상자가 있던데 뭐야?”

“어제 내 생일이었잖니.”

숟가락이 잠깐 멈췄다. 그는 국그릇 속에서 흔들리는 미역 줄기를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시 숟가락을 뜨려다가 이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 몰랐어.”

“괜찮아. 요즘 바쁘잖니.”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서 서운함 같은 건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날과 다름없는 태연함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화를 낸다면, 서운해한다면, 그는 사과를 하고 그걸로 마음이 가벼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할머니의 의연한 태도 앞에서, 그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식탁 위에는 미역국 말고도 평소보다 반찬이 두어 가지 더 놓여 있었다. 잡채, 그리고 그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좋아하던 동그랑땡.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어보았다. 자신의 생일에도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하루를 썼다. 누구를 위해 차린 생일상인지, 정작 그 상 앞에는 자신뿐 할머니 본인은 없었다.

*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는 핸드폰 캘린더를 열어보았다. 할머니의 생일이 분명히 몇 년 전에 한 번 입력해 둔 채로 남아 있었다. 매년 알림이 울렸을 텐데, 그는 그 알림을 언제부터 무시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문득 그는 몇 해 전 생일을 떠올려보려 했다. 케이크를 사 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 기억나는 해가 언제인지조차 불분명했다. 그 불분명함이, 그날따라 유독 마음에 걸렸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그 생각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메일함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는 몇 번이고 미역국을 뜨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옆자리 대리가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아뇨, 아무 일도” 하고 짧게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그 말이, 아침에 할머니가 했던 “괜찮아. 요즘 바쁘잖니.”와 묘하게 겹쳐져 마음이 눌렸다.

점심시간, 그는 회사 근처 빵집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진열장 안에 작은 케이크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잠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가족 중 누군가가 케이크를 사 왔지 않은가, 이제 와서 하루 늦게 케이크를 사 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갑자기 마음 쓰는 것도 이제는 머쓱하게 느껴졌다.

걸으면서 그는 몇 해 전,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던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스무 살 생일이었나, 할머니는 미역국에 소고기를 듬뿍 넣어주며 “이제 어른이네” 하고 말했었다. 그때 그는 그 말이 조금 낯간지러워서 대충 웃어넘겼다. 언제인가 첫 월급을 받으면 여행을 보내 드리겠다고, 그런 말을 했던 것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말을 실제로 언제 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딱히 상관없는 느낌이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낯간지러운 예전 기억을 그는 딱히 붙잡지 않고 흘려보냈다.

*

그날 저녁, 그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평소보다 조금 빨리 했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그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소파 한쪽 끝에 앉았다. 평소라면 바로 방으로 들어갔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재밌어?”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눈빛에 어떤 놀라움 같은 게 스치는 게 보였다.

“그냥 뭐, 볼 거 없어서 보는 거지.”

두 사람은 그 뒤로 별다른 말 없이 십여 분쯤 같은 화면을 보았다. 드라마 속에서는 가족이 저녁상에 둘러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는 그 장면을 보다가, 자기 집 거실이 그 화면 속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했다. 대화라고 부르기엔 부족했지만, 그 십 분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방문을 닫지 않은 저녁이었다.

광고가 나오는 사이, 할머니가 불쑥 물었다. “회사 다닐 만하니.”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 “그냥 그렇지 뭐” 하고 답했다. 더 자세히 말할 수도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거기서 멈췄다. 할머니도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리모컨을 쥔 손으로 잠깐 그의 무릎께를 가볍게 두드렸을 뿐이었다.

*

주말, 그는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 딱히 살 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진열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는 문득 며칠 전 할머니가 슬리퍼 밑창이 다 닳았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걸 떠올렸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생활용품 코너에서 그는 슬리퍼 몇 켤레를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사이즈를 고르기가 애매했다. 결국 적당해 보이는 걸로 하나 골라 계산대로 갔다.

집에 돌아와 그는 슬리퍼를 봉투째로 할머니 방문 앞에 슬쩍 놓아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말을 붙일 자신은 없었다. 그냥 거기 두면 알아서 보시겠지, 그 정도 생각만 하고 그는 방문을 닫았다.

저녁, 부엌에서 그릇 소리가 들리는 사이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누가 사다 뒀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조용히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거실을 오갔다.

그날 밤 밥상에는 그가 좋아하는 반찬이 평소보다 하나 더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숟가락을 뜨는 그의 손이, 그날은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지기까지, 두 사람은 각자의 속도로 밥을 먹었다.

*

다음 날 출근길, 그는 지하철 안에서 여동생에게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할머니 생신 며칠 전에 지나갔어. 너도 전화 한번 드려.” 짧은 문장이었다. 보내고 나서 그는 왜 갑자기 이런 걸 보냈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답장은 한 시간쯤 지나왔다. “어 맞다. 이번 주에 전화할게.” 그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뭔가 작게나마 할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무엇이 전달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적당히 할 일을 한 기분이었다.

*

늦은 밤, 그는 캘린더 앱을 열어 할머니의 생일에 매년 반복되는 알림을 새로 설정했다. 일 년 뒤의 날짜였다. 설정을 마치고 그는 화면을 껐다.

불을 끄고 누운 그는, 낮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미역국, 슬리퍼, 여동생에게 보낸 짧은 메시지. 어느 것도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문득 그는 이 방식이 낯설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회의실에서 절반의 신경만 쓰는 법을 터득했듯이, 그는 가족들 앞에서도 어느새 딱 그만큼의 마음만 쓰는 법을 익혀온 건지도 몰랐다. 들키지 않을 만큼만, 그래도 뭔가 했다는 기분이 나는 정도만. 회사에서 하루를 버티는 것과 집에서 하루를 넘기는 것이,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그 생각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고, 이내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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