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낸 자리에 차오르는 온기
야채를 다져 든든한 속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통통한 가지의 안을 조심스레 파냅니다. 비워낸 자리에 속을 채워 찜기에 올립니다. 뜨거운 김이 한소끔 솟아오르고 나면, 짙은 보라색 껍질은 어느새 부드럽게 숨을 죽이고 마치 순대처럼 몽글몽글하고 윤기 나는 자태가 됩니다. 가지의 비워진 틈새로 가득 채워진 담백하고도 다채로운 맛. 늘 마트에서 마주치면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가지가, 이렇게나 생동감 넘치는 맛으로 다시 태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가만히 도마 앞에 서서 가지의 속을 동그랗게 비워내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비워내는 일은 그저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익숙한 것들을 놓아버리는 데는 아쉬움과 과감함이 필요했어요. 특히 투병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제 마음 한구석에 차마 덜어내지 못하고 품고 있는 것들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보았습니다. 병이 몸을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두려움과 원망, 아쉽고 애틋하고 시리고 슬픈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있었지요. 그 엉킨 마음을 비워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지의 텅 빈 공간에 따뜻한 온기가 채워지는 것을 보며, 비워낸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워냄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무언가를 다시 채울 수 있는 다정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
그것은 치유의 과정과도 꼭 닮아 있었습니다. 수술로 도려낸 자리에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여린 새살이 차오릅니다. 병든 세포가 허물어져 내린 곳을 맑고 건강한 세포들이 든든히 채워준 것이지요. 매서운 추위로 잎들을 털어낸 겨울나무가 새싹을 피워 올리며 따스한 봄을 맞이하듯, 우리 삶도 끝없는 비우고 채우는 과정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비워냄과 채워짐의 반복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더 단단하고 깊게 여물어가는 것일 테지요. 오롯이 비워져야만 비로소 새로운 생명력이 머물다 갈 수 있다는 것을, 저 작은 가지가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무거운 감정들도 가지의 속을 파내듯 조금씩 허물어 보내주려 합니다. 억지로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맑고 시원한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작은 창문을 열어주는 일이라 생각하면서요. 아픔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따뜻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이 머물기를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