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간장절임

겹겹이 스민 엄마의 정성과 사랑

by진정


여름 부엌, 붉은 양파가 주연이 되는 시간


계절이 내어주는 식재료를 사랑합니다. 언 땅이 녹고 봄이 올 즈음엔 쌉싸름한 맛이 당기고, 여름이 깊어지면 늘 요리의 조연이던 양파를 주연으로 끌어올리고 싶어 져요.



올여름엔 덜컥 무안산 자색 양파 10킬로그램을 들였습니다. 무슨 요리를 할지 거창한 계획도 없었지만, 엄마가 세상에 계시던 시절 온 가족이 무안으로 여행 가 맛보았던 그 달큼하고 아삭한 기억이 저를 부추겼을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이 담긴 붉은 오미자 식초


썰어둔 양파와 야채 위로 끓여 부을 간장 절임물을 준비합니다. 만들어둔 양념간장에 더덕을 재워두었던 꿀을 풀고, 다시마, 월계수 잎과 피클링 스파이스를 넣습니다. 그리고 이 요리의 화룡점정, 엄마가 담가두셨던 붉은 오미자 식초를 더합니다.


장아찌와 피클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이름 없는 요리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양파 간장절임이라고 해두기로 하지요.


절임장이 끓어오르며 부엌 가득 새콤달콤한 향이 번집니다. 냉장고에서 차갑게 숙성된 그것을 한 입 베어 무니, 아삭한 소리와 함께 깊은 맛이 입안을 맴돕니다. 더덕꿀의 깊은 단맛과 오미자 식초의 향긋함이 어우러져 간장 절임에 특별한 풍미를 더해줍니다.



다정한 마음은 결코 증발하지 않기에


맛있는 것을 보면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엄마에게서 배운 내력입니다. 예쁘게 나누어 담아 오빠와 아빠에게 보내드리고, 항암 치료를 앞둔 어머니를 모시는 친구에게도 건넸습니다. "맛있게 잘 먹고 건강해지겠다"는 친구의 인사에 마음 한구석이 더워졌습니다.


엄마의 오미자 식초로 빚어낸 이 요리는 훗날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두 번 다시 똑같은 맛을 낼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애틋해집니다.


자연을 누비며 약초를 캐고, 정성스레 식재료를 매만지던 엄마. 우리 집엔 늘 엄마표 산약초 식초와 효소, 장류가 가득했습니다. 엄마는 어떻게 혼자서 그 많은 효소와 식초, 장들을 만들고 관리하셨을까요. 곁을 내어주고 좋은 것을 서로 나누는 일을 기쁨으로 아셨던 분. 하늘의 별이 되신 지 수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시간은 오미자 식초 안에 멈춰 있다가
다시 제 세상으로 흘러든 것 같습니다.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제 손을 빌려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을 데우고 또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반찬으로 피어나, 지친 마음들을 가만히 안아주는 것만 같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는 세상이라지만,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형태를 바꿀지언정 결코 증발하지 않나 봅니다. 어쩌면 세상이 이토록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 온기를 유지하는 건, 이런 보이지 않는 사랑의 유산들이 곳곳에서 숨 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엄마의 온기가 식초로, 다시 새로운 요리로 탄생해 세상을 데우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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