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말들은 오해가 되고

100개의 여의주

by슈팅스타

유주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헬멧을 고쳐 썼다. 그리고 미친 듯이 바이크에 올라타 밀양댐의 어두운 산길을 굽이쳐 내려오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에 의지해 코너를 급격하게 돌던 그 찰나, 아스팔트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후다닥 지나가면서 바닥에 훅 파여 있던 깊은 웅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쿠카 쾅쾅—!

중심을 잃은 닌자가 거칠게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졌고, 유주의 몸은 아스팔트 도로 위로 사정없이 굴렀다. 몇 번을 구르고 처박힌 끝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지독한 이명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유주의 분신 같던 닌자는 이미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깊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처참하게 박살 난 후였다. 유주는 깨진 헬멧 실드 너머로 가쁜 숨을 내쉬며, 부러질 듯한 통증을 견디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는지 간신히 두 발로 설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진짜 재앙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아……!"

아스팔트의 타박상과는 차원이 다른, 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구겨지듯 밀려왔다. 공포에 질린 유주는 떨리는 손으로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가장 먼저 한결의 번호를 누르며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거나…….

군부대의 휴대폰 반납 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탓인지, 차가운 안내음 만이 울렸다. 멀리 체코에 있을 남편 태오에게는 이 폭주의 현장을 알릴 수도,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사방이 가로등조차 없는 산길, 기댈 곳 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처절한 고립이었다.

결국 유주는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며 119 구급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여기…… 밀양댐 내려가는 산길인데…… 사고가 났어요. 배가…… 배가 너무 아파요…… 제발 살려주세요……."

끊어진 통화음 너머로 여름밤의 습한 바람이 유주의 뺨을 스쳤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사랑 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유주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 차가운 기계음과 의사들의 다급한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어쩌면 이 기괴한 비극의 냄새를 유일하게 맡고 있을 태오의 아끼는 후배 강진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수술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베드가 밀려 나왔을 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 켰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유주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려 있었고 온몸에 피 한 방울조차 남아있지 않은 처참한 시체 같았다. 서늘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체스판 위의 여왕처럼 굴던 유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끔찍한 형상을 마주한 순간, 진우는 가슴을 망치로 두드려 맞는 듯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의 덩어리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진우를 더 안타깝게 만든 것은, 이 잔인한 파멸의 한복판에 선 유주의 곁에는 남편인 태오도, 진짜 무선 이어폰의 반쪽 같은 한결이도 아닌,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수술실에서 병실로 올라온 진우는 침대 맡에 서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유주의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회복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나 흘러가고 있었지만, 유주의 의식은 여전히 칠흑 같은 심해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베개 위에 흩어진 유주의 모습은 그저 껍데기만 남은 서글픈 조각품 같았다.

지금 여기, 자신이 보호자라는 이유로 유주의 곁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진우는 몰려오는 무력감에 숨이 막혔다. 이 거대한 파멸의 사건들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 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난밤에 유주가 홀로 감행한 미친듯한 야간 라이딩도, 밀양댐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박살이 나버린 가와사키 닌자도, 그리고 마녀사냥의 저주처럼 처참하게 바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유주의 아이도……. 이 모든 비극의 조각들이 진우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감은 눈을 파르르 떠는 유주의 얼굴 위로, 태오 형의 얼굴과, 급하게 병원이라고 끊어 버린 진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하은이의 얼굴이 잔인하게 스쳐 지나갔다.

서툰 거짓말과 침묵의 대가가 결국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지 가늠 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를 가장 두렵고 비참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유주가 눈을 떴을 때, 대체 자신이 어떤 말로 유주의 슬픔을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불을 지른 이들도, 방관한 이들도 모두 부재한 이 백색의 방에서,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진 듯한 진우는 눈을 뜰

유주를 기다리며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무거운 침묵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진우는 시트 위로 드러난 유주의 얼음장 같은 손을 바라보며, 간신히 무거운 입술을 뗐다.

"……지금이라도 태오 형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에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태오 형이 가질 실망과 서운함 클 것 같아요."

유주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너머로 여전히 독기와 슬픔이 뒤엉켜 있었다.

"안 돼요…… 그럼 그 사람, 체코에서 당장 다 버리고 달려올 거예요. 그렇게 까지 그 사람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나중에 알게 된다면……."

진우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태오뿐만 아니라 진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잔인한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이 이곳 사랑 병원에서 유주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보호자로 곁을 지키고 있다는 이 현실을,

하은이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유주는 깨진 유리 조각 같은 표정으로 신음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저 나름대로 우리 아이를 보낸 것을 남겨두고 싶어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태오 씨가, 그 순간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진우 씨가 이렇게 도와준 건 내가 전부 다 잘 설명할게요."

진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유주의 얼굴을 보며, 그 처절한 마지막 부탁마저 하지 말라고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설사 나중에라도 하은이가 이 모든 일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쳤던 이 비극적인 상황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진솔하게 설명하겠니라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리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차가운 하늘의 별이 되어 떠나간 가여운 아이에게,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예의이자 온전한 애도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우는 핏기 없는 유주의 침대 곁에서 침묵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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