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여의주 2
[잠시 제 3자의 시점으로 전환됩니다]
"진우 씨…… 미안해요. 사고가 났어요. 배가 너무 아파서…… 너무 무서워요……."
사랑병원 응급실의 푸르스름한 가림막 너머, 유주는 늘 유지하던 포커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완벽하던 유주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고 처참히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며, 진우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선 수속부터 할게요."
원무과 창구 앞, 응급 원서의 서식지 위에서 진우의 펜 끝이 흔들렸다.
관계란을 채워야 하는 순간, 진우는 보호자 '강진우'라고 세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가 두 줄로 긋고 그 자리에 '이태오'라는 이름을 적었고 전화번호란에는 진우의 번호를 적었다.
자신이 이 여자의 보호자가 될 수는 없었고. 결코 되어서도 안 되었다.
응급 처치를 마친 의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외상은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입니다. 뼈나 장기에는 큰 이상이 없어요."
"문제는 환자분이 임신 초기라는 점입니다. 사고의 충격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궁 상태가 무척 불안정해요. 지금 당장은 유산 징후가 보이지 않더라도, 산모와 태아의 상태는 앞으로 며칠간 절대로 안정을 취하며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응급실에 계시는 것보다 일단 입원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당장 입원 수속을 해 주세요"
진우가 침대 곁으로 돌아와 입원을 권하자, 유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지구 반대편 체코에 있는 남편 태오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홀로 공포를 감당할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그 여름의 깊은 밤, 진우는 새벽까지 유주의 입원 수속을 돕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원래 예정되어 있던 날짜보다 무려 이틀이나 앞당겨진 오전 10시,
부산국제학교의 최종 채용 합격자 발표가 기습적으로 공지되었다.
[부산국제학교: 구하은 님의 최종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휴대폰 화면 가득 박힌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마주한 순간, 하은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거듭되는 실패와 그로 인한 열등감.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받아 든 인생 최고의 상장이었다.
하은은 너무 기쁜 나머지, 3일 전 약속했던 '둘만의 파티'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진우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걸려 했다. 하은의 손가락이 진우의 번호를 누르려던 바로 그 시간.
오전 9시 30분, 밤새 유주의 보호자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진우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사랑병원 산부인과 병동으로부터 걸려 온 급박한 전화였다.
"이태오 씨. 공유주 씨 보호자분 되시죠?! 어젯밤 사고로 입원하신 공유주 산모님, 지금 하혈이 심해서 산모와 아이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태아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 바로 응급 수술 들어가야 하니까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서 수술 동의서 작성해 주세요!"
"예?! 수술이요?!"
진우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수술 동의서. 법적 보호자가 아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바카라임이 덮쳐오고 있었다.
진우가 미친 듯이 GV70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사랑병원 수술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 바로 그 10시. 하은의 전화기는 진우의 통화 중 신호음만을 차갑게 뱉어내고 있었다.
당당하게 합격해서 멋진 여자 친구로 진우의 옆에 서고 싶었던 태양의 궤도와, 유주의 지옥에 갇혀버린 진우의 어두운 궤도가, 인생에서 가장 축하받고 싶었던 날 아침에 그렇게 잔인하고 비극적으로 엇갈려 가고 있었다.
"……하은아."
통화 중 신호음이 몇 번이고 울린 끝에 간신히 연결된 진우의 목소리는, 하은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을 만큼 거친 숨소리로 갈라지고 있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바퀴 달린 베드가 굴러가는 소음 속에서, 진우는 수술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진우야! 나……."
하은이 마침내 최종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입 밖으로 꺼내려던 찰나, 진우의 급박한 목소리가 하은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고 들어왔다.
"어, 하은아. 나 지금 병원이야."
"……병원? 어디 아파?"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던 하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가라앉았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불길한 소음들이 하은의 촉을 날카롭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수술실 문 위의 '수술 중'이라는 빨간 등과 자신의 손에 쥐어진 공유주의 응급 수술 동의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금 태오 형의 아내 유주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은이에게 도저히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 어제 회사에서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혈압이랑 다른 수치들이 너무 높게 나왔다고 해서 그래. 의사가 당장 병원 다시 가서 정밀 검사받아보라고 신신당부하길래…… 오늘 오전에 시간 내서 잠시 정밀 검사받으러 나왔어."
진우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서둘러 말을 끊었다.
"내가 검사 다 끝나고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미안해."
하은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휴대폰 화면 위로 '통화 종료'라는 냉정한 글자가 박혔다.
하은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건강검진 수치가 높아서 정밀 검사를 받으러 왔다는 진우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다급함, 그리고 평소의 직진 본능과는 다르게 벽을 치고 도망치듯 전화를 끊어버린 낯선 이질감.
동시에 사랑병원 3층 수술실 앞. 진우는 '환자 명: 공유주 / 보호자: 이태오'라고 적힌 수술 동의서의 서명란에 기어이 제 손으로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인을 끝내고 수술실 문에 빨간 '수술 중' 표시등이 켜진 순간, 진우는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지독한 슬픔의 덩어리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어머니의 따스한 뱃속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 이 세상의 단 한줄기 빛조차 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린 '별'이 된 것만 같았다.
핏줄이 끊겨나간 생명의 서늘한 한기가 진우의 척추를 타고 심장을 얼려 극심한 고통이 온몸으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