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의 마지막 라이딩

100개의 여의주 2

by슈팅스타

사랑병원의 특실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과 서늘한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진우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고 밤새 제 곁을 지키다 돌아간 그날 밤, 유주는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배 속은 텅 비어 버린 듯했고, 사방은 적막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시려오는 무력감 속에서 유주의 기억은 잔인하게도 , 이 파멸의 서막을 열었던 그날 밤의 통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날 밤, 유주는 한결에게서 여러 통의 문자를 받았었다.

[누나가 어젯밤 꿈에 나왔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여긴 밤하늘엔 은하수가 보여요...]

[... 하루가 너무 길어...]

[... 너무 보고 싶어...]

[토요일 날 시간 되면 나 보러 와주면 안 돼요? 외출 가능하게 해 볼게요]

휴대폰을 바라보던 유주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오가 체코로 떠난 사이, 제 배 속에서 자라나는 생명의 정체를 마주한 유주는 더 이상 한결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주는 한결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한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주는 감정을 지워낸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 말했다.

"안 해. 안 가."

"... 보고 싶어요. 누나도, 그리고....."

수화기 너머 한결의 젖은 목소리에 유주는 가슴을 후벼 파는 가시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 혹시라도, 네 아이라고 생각하니?"

잠시의 침묵 끝에 돌아온 한결의 어조는 단단하고 묵직했다.

"아니."

"그런데?"

"그날 누나를 잡았어야 했어요."

"그니까 이제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요"

한결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유주도 이성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냐. 그러니까 너 꿈 깨."

"그럼 태오 형도 속이고, 나도 속일 건가?"

한결의 날카로운 질문에 유주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 씨 아이야. 그리고 반드시 낳을 거고. 이 아이는 내가 우리 아빠한테서 벗어나기 위한 제일 빠른 길이야."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한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먹이듯 떨리는 목소리로 한결이 물었다.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넌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야."

"그날 내가 다 바카라임진다고 했잖아요! 그날 밤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도!"

한결이 거칠게 전화를 집어삼킬 듯이 소리를 질렀다. 5월의 소나기 속에서 유주를 안고 순수하게 버둥거리던

그 남자의 포효였다.

"내가 준비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요! "

" 누나 괜찮은 척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요! 마녀사냥이 뭔 줄 알아요?"

"……뭐?"

"마녀는 주술로 농작물을 망치고, 가뭄이 들게 하고, 과일을 썩게 만들어요. 짚인형에 바늘을 찔러 사람을 죽게 하고, 여자가 아이를 못 낳게 만들고, 폭풍과 벼락으로 사람과 가축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겨졌어. 공중을 날아다니며 마녀 집회에 참석한다고 믿었지. 그게 마녀사냥이야."

광기에 어린 천재의 독백이 유주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날 밤, 우리 둘이 사라진 거…… 동호회 사람들도 다 알아요. 그게 언제까지 비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날 이준이가 우릴 찾으러 강변 주차장으로 왔었어. 누나는 술 취해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이준이가 누나랑 나, 차 안에 있는 거 다 보고 갔다고."

유주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세상 모든 것을 제 통제 곡선 안에 두었다고 믿었던 유주의 세계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결은 마지막 쐐기를 박듯 서늘하게 말했다.

"만약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태오형이 아니라 나랑 똑같이 닮으면? 그때도 숨길 거야? 그때도 태오형 아이라 할 거냐고!"

챙그랑—!

공포와 충격에 휩싸인 유주의 손에서 마시던 찻잔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얇은 도자기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거칠게 튀어 나갔고, 깨진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유주의 하얀 발등 위로 사정없이 떨어져 박혔다.

붉고 뜨거운 피가 발등을 타고 흘러내려 대리석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지만, 유주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타인을 속이고 세상을 조작하려던 대가가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을 사냥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주는 한결이 뱉어낸 '마녀사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녀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리에서 이탈한 이방인을 처단하기 위해 평범한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잔인한 집단 광기이자, 짝을 잃은 눈먼 비난의 칼날이었다.

만약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지독한 광기의 화살이 자신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아이에게로 쏟아진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처럼 아득해졌다. 통제 곡선이 완전히 망가진 세계에서 유주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유주는 옷장을 열어 투박한 가죽 라이더 재킷을 꺼내 입었다. 단단한 보호 장갑을 끼고 레이싱 슈즈의 끈을 거칠게 동여맸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두운 지하 차고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는 그녀의 성난 가와사키 닌자가 서 있었다. 유주는 직감했다. 오늘 밤의 라이딩이, 아마도 이 닌자와 함께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라이딩이 될 것이라는 것을.

부르릉—!

지하 차고를 찢어발기는 거친 배기음과 함께, 무덥고 습한 8월 말의 여름밤 라이딩이 시작되었다.

밤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지독하게 짙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암흑이었다. 하지만 폭주하는 유주에게 도로 위의 희미한 불빛도, 하늘의 거대한 어둠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맴도는 공포를 덜어내기 위해 가속 레버를 끝까지 감아쥐었다.

닌자와 함께 정신없이 아스팔트를 가르며 달리다 보니, 백미러 너머로 익숙한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운명의 장난처럼 유주가 다다라 있는 곳은 태오와의 결혼식이 있었던, 그 배내골이었다.

유주는 밀양댐 전망대 초입에 닌자를 거칠게 세우고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전망대 난간으로 올라섰다. 난간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기서 그냥 떨어져 죽어버릴까.’

비참한 예언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결국 나도 한결이의 비아냥처럼, 소설 속 마담 보바리처럼 추악한 허상을 쫓다 잔인하게 자멸하고 마는 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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