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만약' 이 지나간 자리

100개의 여의주 2

by슈팅스타

8월의 한낮은 여전히 매미 소리로 들끓었지만 , 진우와 하은이를 둘러싼 공기만큼은 소리 없이 서늘해지고 있었어요. 국제 학교 교사 채용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고 사흘이 지난날이었어요. 그 며칠 동안 이상하리 만큼 하은에게서 연락이 없었어요. 진우 역시 3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없이 지내온 터라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고민을 했어요. 그날이 합격자 발표일 일거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먼저 대뜸 물어보아 혹시 모를 상처를 건드리긴 보다 하은이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편을 택했어요.


그러나 결국 참지 못한 진우가 먼저 하은이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휴대폰 너머 하은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어두웠어요

"너.. 괜찮아?"

수화기 너머의 무거운 공기에 진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어요. ' 이번 교사 채용에서 떨어졌구나'

만약 그때라도. 하은이가 그 어둠을 걷어내고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 엉 진우야 나 최종 합격했어. 우리 약속대로 오늘 만날까?"라고 그 쉬운 한마디만 했더라면 ,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까요

하지만 하은이는 끝내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요즘 잠을 잘 못 자. 작은 고양이 소리에도 자꾸 잠을 깨"

"하은아 힘내. 내가 네 옆에 있잖아... 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나한테 와도 돼"


진우가 던진 그 '언제든지'는 아마도 그날 밤. 혹은 늦어도 그다음 날이면 하은이가 돌아와 다시 진우의 옆에 있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하은이는 직감하고 있었어요. 이미 두 사람의 운명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요


그날 밤 진우가 자신이 아닌 유주의 병원으로 급박하게 찾아갔다는 사실을 하은이가 영영 몰랐다면


그리고 애초부터 진우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그 푸르던 배내골을 라이딩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결혼식 따윈 보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3일 전 최종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진우에게 기쁜 마음을 바로 전했더라면


진우가 보고 싶다고 했던 밤, 그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우를 만나 함께 밤을 지새웠더라면


수많은 "만약"이라는 잔인한 가정들이 하은이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어요


3일 전,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기 몇 시간 전의 밤이었어요. 진우에게서 날아온 문자 메시지는 쏟아지는 여름밤의 열기를 더 뜨겁게 달구었어요.


[하은아, 오늘 밤 우리 집으로 올래? 너무 보고 싶다. 어린 늑대가 어린 소녀를 만났을 땐 그저 소녀를 지켜줘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 늑대가 어른이 되고 , 소녀가 숙녀가 되자 이젠 늑대 놈이 매일 숙녀를 옆에 두고 잡아먹고 싶어 한다. 어쩌지? 그게 늑대파 남자 친구를 둔 너의 운명이야]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하은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었어요. 소요헌에서 연료 탱크를 터뜨릴 듯 직진하던 진우의 거침없는 숨결이 문장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어요. 당장이라도 그의 집으로 달려가 단단한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하은이는 스스로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오직 제 힘으로 당당하게 일어선 멋진 여자 친구로서 진우의 옆에 서고 싶었어요

하은이는 다부지게 답장을 보냈어요.


[당당하게 합격하고 네 옆에 멋진 여자 친구로 나타날게. 조금만 기다려, 내 늑대파 남자 친구.]

그 순간이 하은이가 진우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타이밍이었어요. 하은이는 스스로 완벽해지기 위해 다정한 유예를 선택했던 바로 그날 밤, 진우의 세계는 다른 방향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디링—.

늦은 밤, 침대에 누워 하은이의 답장을 보며 미소 짓던 진우의 인스타 DM 알림이 울렸어요. 진우의 미간이 단숨에 굳어졌어요. '공주, 유'. 공유주였어요.


[진우 씨, 밤늦게 죄송한데 지금 사랑 병원으로 와 줄 수 있어요? 태오 씨는 체코에 가 있고, 부모님께는 지금 연락을 드릴 수가 없어서 그래요…….]


뒤이어 전송된 유주의 DM은 문장이 채 마무리되지도 못한 채 뚝 끊겨 있었어요. 다급함과 위태로움이 묻어나는 그 짧은 텍스트를 마주한 순간, 진우의 머릿속에는 거대한 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쳤어요.


'좋아하는 선배 태오는 지금 한국에 없다. 남편도 없는 이 깊은 밤에, 왜 친정 부모도, 시부모도 아닌 자신을, 그것도 병원으로 급박하게 호출하는 것인가.

만약 강릉의 밤에 태오형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다면 완전히 모른 척을 하고 싶었을 텐데. 진우 역시 상황을 모른 척은 할 수 없었어요.

화면 속 뚝 끊긴 문장을 바라보던 진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떠오른 얼굴은 역시 나 하은이었어요.


만약 유주가 정말로 벼랑 끝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이 아닌 하은이 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하은이가 이 모든 관계의 회오리에 한번 더 휘말리게 된다면 ,

유주를 둘러싼 이 모호한 비밀을 마주하기엔 감당해야 할 힘든 무게에 하은이의 여린 세계가 통째로 짓눌려 부서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진우의 뇌리를 스쳐갔어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조각들이었어요.

그날 밤, 5월의 소나기가 쏟아지던 한결의 군주 모임 날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그 묘한 불안함을 직감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유주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고 따르는 동호회 선배, 태오형의 아내가 아니었더라면. 그렇다면 진우는 이 깊은 밤의 호출을 가차 없이 무시하고 사랑 병원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진우는 모든 것을 알아채 버렸고, 그 진실의 꼬리를 느낀 순간부터 일말의 기묘한 바카라임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어요. 동호회의 막내 한결에 대한 연대 바카라임인지, 혹은 홀로 체코에서 있을 태오형을 향한 의리인지, 아니면 제 여자 친구인 하은이를 이 복잡한 늪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시키기 위한 방어 기제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었어요.

.


결국 진우는 하은이 남겨둔 다정한 문자를 뒤로 한 채, 겉옷을 챙겨 들었어요.

어둠이 짙게 깔린 시내의 밤거리를 뚫고, GV 70의 거친 배기음이 무거운 공기를 찢어 놓았어요. 네온사인이 서늘하게 켜진 사랑 병원 응급실 앞, 차를 거칠게 주차한 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병원 로비 안으로 내달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