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얘기해."
내가 재촉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말려 죽이는 거라고... 니가 나를 기다리느라 잠도 잘 못 자고... 일상생활도 못 한다고... 진짜 사랑하는 사이면, 너무 바쁠 땐 잠시 헤어져 있더라도, 다시 만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제야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 진짜 이렇게 남인 채로 있을 거야? 계속?'
'... 너는 어떻게 나를 잊는 게 매번 그렇게 쉬워?'
나는 우리가 헤어질 때 그녀가 나를 완전히 밀어내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녀가 혼자 그 모든 걸 감당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내가 한심해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민유정이나 나를 향한 분노보다 그간의 서러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나를 진짜 다시는 안 볼 생각인 줄 알았어..."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런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안색을 살폈다.
"미안해..."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내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따뜻함에 결국 여태 참아왔던 감정이 말끝에 묻어나고 말았다.
"내가 너한테 전화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한 번만이라도 받아주지..."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안해, 윤재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몇 번이고 흔들렸어. 너한테 전화 걸고 싶고, 만나러 가고 싶었어. 그치만...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게 아닌지 무서웠어.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실은... 일을 그만두려고 했었어."
그 순간, 번뜩 그녀의 매니저 말이 떠올랐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전후 사정까지 알고 나니 충격은 더 컸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근데 차마 못 그랬어... 내가 그만두면..."
그녀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잘했어. 만약에 니가 그랬으면 나는 더 비참했을 거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내 얼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윤재야. 내가 너랑 있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 제발 짐이라는 둥,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녀는 헤어지던 날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괴로운 듯 보였다. 나는 내 뺨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 할게."
그녀는 내 대답을 듣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
하지만 아직 그녀는 불안해 보였고,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건넸다.
"아, 그리고 나 이제 기다리는 거는 좀 잘해. 베테랑이랄까?"
그녀의 눈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널 일 년이나 기다렸잖아."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나는 내 뺨에 대고 있던 그녀의 손을 살짝 내리고 다시 제대로 맞잡았다. 잡은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그동안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깨닫고 새삼 목이 메었다.
"그때도 이렇게 서로에게 솔직히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지."
그녀는 눈만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진영아."
내 부름에도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긴장한 듯 보이는 그녀에게 용기를 내 말했다.
"...우리 계속 같이 살까?"
"뭐?"
'다시 만나자' 정도의 말을 예상했을 그녀는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너무 충동적인가?"
같이 살자는 말은 충분히 고민한 뒤에 꺼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솔직히 지금 내가 내뱉은 말은 우리의 관계에 대한 정립도, 그녀의 회사의 입장도,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마음이었다.
그냥 지금 나는 좀 취했고, 그녀가 우리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너무 좋았고,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너무 예뻤고, 당장 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점점 어려웠고... 그리고 같이 살면 기다리다 지쳐 싸울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마음이 거짓이라는 건 아니다.
평소의 나라면 이렇게 충동적으로 말을 뱉진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온갖 감언이설로 포장하고 그녀를 설득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응. 조금?"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를 탓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내 충동적인 제안에 휩쓸리지 않아서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향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눈을 감은 채 내 입에 가져다 대고 그녀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그냥 지금 그녀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나도..."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다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과 무언가를 어렵게 말하려고 달싹이는 그녀의 입술이 보였다. 아직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음에도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나도 너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동안 눌러왔던 갈증과 허기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짐승처럼, 평소보다는 조금 더 거칠게 그녀의 입을 삼켰다.
그녀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맞잡았던 손을 놓고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 올린 뒤 내 위에 앉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후 그녀의 허리 곡선을 따라 위로 올라간 내 손은 속옷 안쪽에 숨겨져 있는 봉긋한 그녀의 가슴을 찾아 움켜쥐었다.
"아...!"
그녀가 내 입에서 입을 떼며 짤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사이 나는 입술을 움직여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때, 희미해졌지만 아직은 옅게 남아있는 붉은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걸 보자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서 그녀의 목을 깊게 빨아 그 자국 위로 내 것을 남겼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한동안 목에 머물러 있던 나는 이번에는 그녀의 쇄골을 훑어 내려가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자세를 바꾸었다. 이제는 그녀가 내 아래에 있고, 나는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자, 하마터면 나는 지금 여기가 침대가 아닌 거실 소파 위라는 것도 잊고 달려들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숨을 한 번 고르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방으로 갈까?"
하지만 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 멈추지 마."
그녀가 나를 잡아당겼고,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석처럼 그녀에게 이끌렸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서로를 원했고,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찾은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딱 맞아떨어졌다.
그 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던 우리는, 해가 뜨는 걸 보고서야 밤이 샜다는 걸 알아차렸다.
"조금 춥지... 잠은 방에서 잘까?"
"추워?"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쓰고 있던 내 방으로 그녀를 옮겼다. 그녀를 침대 위에 올려놓자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네 방으로 갈 거 아니지?"
"응. 안 갈게."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괜히 얼굴을 붉혔다.
방금까지 내게 매달려 나를 갈망하던 그녀가 이제 와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니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배 안 고파? 뭐 좀 해줄까?"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밤새 에너지를 잔뜩 쏟았으니 배가 고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침을 차려주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실패했다. 결국 나는 중심을 잃고 침대 위로, 아니 그녀의 위로 넘어졌다.
"뭐야!"
내가 당황하자, 그녀가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댔다.
"조금만 더 이러고 같이 있자."
그녀의 말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 말할 때가 아니었다. 나야말로 방금까지 실컷 짐승처럼 굴었던 주제에 이제 와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 꼴이라니.
그사이 그녀가 내 품으로 파고들어 나를 꼭 안았다. 예고도 없이 그녀의 맨살이 닿아 아주 잠깐 당황은 했지만, 나 역시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이랑은 이젠 사이 괜찮아?"
나는 그녀의 귀 옆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응. 나 중학교 때도 형이랑 사이 좋았잖아."
"맞아. 기억나. 형이 데리러 온 적도 있었지. 그래서 전혀 상상도 못했어... 속상해."
"지금은 다 이해가 돼서 괜찮아. 그땐 형도 어렸으니까. 지금은 그냥 돈 많이 버는 든든한 형이야."
내가 너스레를 떨자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내 가슴팍에 기대었던 고개를 들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돈 많이 버는 든든한 여자친군데?"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와~ 신난다. 나는 쥐꼬리만한 월급 타는 공무원인데."
그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가 묻자,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시의 침묵 후 말을 꺼냈다.
"우리 같이 살면 어디서 살 거야?"
"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술도 다 깬 상태에서 이렇게 훅 들어올 줄 몰라 당황한 탓이었다.
"이 집, 자가야?"
"어?"
나는 계속 어리바리하게 되물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속물이어서 물어보는 게 아니고. 난 이 집도 좋은데, 전세나 월세면 돈 아까우니까."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걸 물어본다고?"
그녀는 내가 당황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늘 곧았다. 언제나 피하기만 하는 나를 똑바로 세우고 앞을 보게 했다. 나는 아직 미소를 머금은 채 사랑스러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살고 싶은데?"
내가 묻자 그녀는 나를 다시 안으며 대답했다.
"연희동 집은 너무 커. 연예인은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데. 공무원 월급으로 감당하기에는 거긴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이사는 가기 싫다며."
"그렇긴 한데... 어쩔 수 없지. 할머니도 이해해 줄 거야. 우리는 그거 정리해서 아파트로 이사 가자. 애기 키우려면 아파트가 좋대. 학군지, 초품아?"
나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아... 우리 벌써 애기도 낳는 거야?"
"응. 나는 둘 정도가 좋아. 쌍둥이로 한 번에 낳아도 좋아."
"쌍둥이...? 쉽지 않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사실 당장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지금은 달콤한 상상에 취해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며 그리는 것이 즐거웠고, 현실적인 '진짜 문제'들을 언급해 그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 나는 좀 전의 대화가 그저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막연한 먼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그런 종류의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영이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
.
.
"뭐!?"
다다음 날, 나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다가 순간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날 바라보는 걸 느끼고 그제야 목소리를 줄였다.
"뭘 내놨다고?"
"집."
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 순간 되물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뻔했다. 나는 혹여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전화에 대고 속닥거렸다.
"진영아, 회사랑은 얘기를 한 거야?"
"내가 내 집을 파는데 회사랑 얘기를 왜 해."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같이 살기로 한 걸 회사에 얘기해야 하지 않냐는 말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 내뱉냔 말이다.
"...일단 나 퇴근하고 나서 천천히 얘기해보자.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왜? 너 설마, 우리 같이 살기로 한 거 후회돼?"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님 됐어. 어! 부동산 전화 온다. 일단 끊어. 내 사랑! 이따 봐~"
"진영아...!"
나는 끊어져버린 전화에 대고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을 때도 이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늦게까지 같이 낮잠을 자고, 같이 밥을 해먹고, 저녁에는 사람들 눈을 피해 산바카라도 다녀왔다. 서로 대화도 진짜 많이 했는데, 그중 '집을 내놓겠다' 같은 폭탄 발언은 분명 없었다.
나는 퇴근 시간까지 초조하게 시계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고 땡 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집으로 차를 달리는 동안에도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같이 살자고 한 말을 어디까지 생각한 걸까. 사실 나는 지금처럼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늘리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날 아침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그녀는 결혼을 원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아직 프러포즈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결혼 준비를 시작하는 건가? 남들도 다 이렇게 하나 보통? 아니 그보다, 내가 지금 결혼을 할 수 있는 상태인가? 아니지 그딴 것보다도 그녀의 회사에서 그걸 가만히 둘까?
"왔어!?"
급히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나를 반기며 달려나왔다. 그녀는 내 티셔츠를 잠옷처럼 걸친 상태였다. 나보다 한참 작은 그녀에게 내 옷은 그녀의 허벅지 선 정도까지 내려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자마자, 방금까지 했던 모든 생각이 날아가버렸다. 그래... 그녀가 이렇게 예쁜데,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나 따위의 마음의 준비가 어찌 되었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
내가 채 신발도 벗기 전에 그녀는 내게 달려들어 안기며 내 입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녀를 안아 들고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그사이에도 그녀는 계속 내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멈추게 하고, 대화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만 있었을 뿐이었다.
...나라는 놈은 생각보다 이성적이지 않은 놈이었다.
그렇게 또 한바탕 불타오르고 난 뒤에야 우리는 제대로 대화란 걸 할 수 있었다. 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내 앞에 그녀를 앉힌 채 거품을 낸 샤워 타월로 그녀의 팔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씻겨주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아까 전화했던 거 말이야."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 깜빡했다. 우리 그거 얘기해야 되지!"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일단 집을 내놓긴 했는데, 그 집이 금방 팔릴 것 같진 않더라고.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 그래서 말인데, 너는 아직 무주택자인 거지? 내가 집을 또 사면 2주택이 돼서 일단 네 명의로..."
나는 또 말을 쏟아내고 있는 그녀를 잠시 멈춰 세웠다.
"아니 그런 것보다, 진영아. 너 회사에는 얘기했어?"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회사 얘기를 왜 자꾸 하는 거야? 내가 너랑 사는데 회사 동의가 왜 필요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안... 필요해?"
혹시 그녀는 결혼까지 원하는 건 아닌 건가? 내가 지금 혼자 김칫국 마시며 너무 멀리 생각한 걸까? 나는 계속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의 머릿속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테오처럼 계약서에 연애 금지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구랑 살든, 누구랑 만나든 계약상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어. 나는 마약, 폭력, 음주운전 같은 거만 안 하면 돼."
테오는 그런 게 있구나. 나는 새로운 세상 이야기에 잠깐 흥미를 느꼈다.
"넌 없어?"
그녀는 나를 보았다.
"응, 없어. 우리가 무슨 애기 때 데뷔한 아이돌도 아니고, 내가 메인 보컬도 아니고."
그녀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내 몸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물론 당장 결혼식은 무리겠지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결혼식...?"
그녀는 내게서 떨어져 나온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결혼식 하고 싶어? 혹시 로망 있어?"
"아니, 그 소리가 아니고..."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일단 여자 연예인인데 진짜 괜찮을 리가 없지 않나? 아무래도 그 무섭게 생긴 매니저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것 같은데.
"너만 괜찮으면, 일단은 혼인신고만 먼저 하고... 식은 나중에 천천히 올리자. 대신 내가 예물은 엄청 좋은 걸로 해줄게!"
"혼인신고?"
"왜? 그럼 넌 결혼도 안 하고 혼인신고도 안 하고 같이 살 생각이었어?"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서 진땀이 났다. 그러게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내가 당황해서 쩔쩔매는 꼴을 보고는 그녀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정신 차리라는 듯 내 팔을 한 대 찰싹 때렸다.
"농담이야!"
그녀는 아직 얼굴에 장난기가 묻어 있는 채로 내게 바짝 다가 앉았다.
"너한테 묻지도 않고, 내가 혼자 결혼까지 밀어붙인다고 생각했어?"
나는 눈만 꿈뻑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이라는 거지?
"집을 내놓긴 했어. 보안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든, 계속 여기 있든, 집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어쨌든 너랑 같이 살곤 싶으니까 집이 빨리 안 팔리면 네 명의로 사자는 것도 진심이긴 해. 뭐 세금이나 이런 문제는 따져봐야겠지만. 근데 그 뒤 얘기들은 네가 하도 당황하길래, 장난 좀 쳐본 거야."
그리고는 내 몸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훑어내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뭐, 나도 사고를 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손을 멈추고 내 귀에 자신의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애기라도 생기면 모를까, 당장 결혼은 어렵지."
이놈의 기지배가 지금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도발에 넘어간 것이 창피해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조금 분해서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살짝 밀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그녀가 장난인 걸 알았으면, 안심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은근히 그녀가 밀어붙여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녀의 말이 장난이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내가 그녀의 미래까지 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미치겠네. 무슨 청개구리도 아니고...
하지만 확실했다. 나는 그녀와 결혼이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