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얼마 뒤, 나는 저녁을 준비하다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녀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상태였다.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노크를 했다.
"... 저녁 안 먹어?"
"안 먹어!"
나는 이번에는 함부로 문을 열지 않고 그 밖에 서서 이야기했다.
"김치찌개 끓였는데?"
"안 먹는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그녀를 꾀어내기 위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꼬셔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말을 꺼냈다.
"... 밥 먹고 영화 보러 안 가?"
그녀는 내 질문에 잠시 답이 없었다. 이윽고 문이 살짝 열리며 여전히 약간 삐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가 나를 빼꼼 내다보았다.
"...갈 거야."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짜증난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웃지 마. 나는 어디까지나 진짜 영화관이 가고 싶은 거야."
"알겠어. 나와서 밥 먹어."
그녀는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덜어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같이 사니 이런 건 좋았다. 서로 싸우고 화가 나도 도망갈 곳도 없이 다시 마주봐야 하는 것. 그래서 싸움이 오래가지 못했다.
"나 원래 찌개 같은 거 먹으면 얼굴 부어서 잘 안 먹는데 니가 힘들게 차렸으니 내가 한 입은 먹어 주는 거야."
"네 네. 드세요."
그녀는 괜히 투덜대며 내가 끓인 찌개를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며 동그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나는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녀의 앞으로 계란말이도 밀어주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촬영도 없잖아. 편하게 먹어."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약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한데 모으고는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바짝 올려 단단히 묶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먹을 자세를 취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지난번 샌드위치도 그렇고. 너 요리 엄청 잘한다.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거 같아. 요리 학원이라도 다녔어?"
그녀는 방금까지 삐졌던 걸 까먹은 사람처럼 쫑알거렸다.
"할머니한테 배운 거야. 샌드위치는 뭐, 크림치즈가 비법이지."
"헤에..."
"...민유정은..."
내가 말을 꺼내자 밥을 먹던 그녀가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니가 보기에 내가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 알아."
그녀는 내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민유정이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도 맞아."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아니, 이성적인 그런 특별함이 아니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던 일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내 어두운 과거에 대해 말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오해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형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가 이제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엄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전까지 부러울 것 없이 화목했던 우리 집은, 엄마의 사고 이후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아버지는 혼자서 일도 다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두 아들까지 키워야 했으니 늘 여유가 없고 바쁘셨다.
형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1학년이었다. 몸은 어른이 되어가는데 마음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힘든 시기에, 형은 엄마까지 잃고 유난히 더 힘들어했다.
내가 그런 형의 유일한 창구였던 것 같다. 형은 내가 눈에 띌 때마다 갈 곳 없는 분노를 내게 쏟아냈다. 처음부터 심했던 건 아니었지만, 말릴 어른도 없는 그 집에서 나는 점점 심해지는 형의 구타와 폭언을 혼자 견뎌야 했다.
그러다 형은 점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어떤 날은 얼굴에 상처가 난 채 집에 오기도 했다. 그래도 형이 분노를 다른 곳에 쏟아내고 있어서인지 나를 때리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내가 형이 아끼던 물건을 잘못 건드린 날이 있었다. 형이 어릴 때, 엄마와 함께 만든 머그컵이었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결국 컵은 깨져버렸고 형은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날은 형에게 한참 맞다가 어느 순간 잠깐 기절했던 것 같다. 내가 정신을 조금 차렸을 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내 귀에 들린 건, 민유정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우리 형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때는 민유정이 나보다 키도 크고 믿음직스러웠던 때였지만, 그래도 우리 형보다는 한참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와 형 사이를 막아서고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우리 형에게 지지 않고 맞서며 나를 지켜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오랜만에 나를 본 그녀의 어머니는 내 꼴을 보며 한참을 우셨다. 민유정의 어머니는 우리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병원에 실려간 나는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날 저녁 유정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병원에 달려오신 아버지는 그때 모든 사실을 알게 되셨다.
"...그래서 걔는 그냥,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가 없는 가족 같은 거야."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물론 걔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다 괜찮다는 건 아니야. 내가 진작 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자꾸 미뤘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너한테 이해해 달라고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야. 이건 내가 정리해야 할 몫이지... 단지..."
나는 다시금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말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서였다. 나는 그녀가 나와 민유정 사이를 오해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게 중요한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알겠어."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듯 담백하게 대답하고 밥을 한 술 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
"알겠다구. 이제 오해 안 한다고. 밥 먹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술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내가 아직 멍하게 있는 사이, 내 밥그릇으로 계란말이를 올려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이 따뜻하게 느껴져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그 이후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가벼운 잡담을 늘어놓았다. 그 덕에 우리는 방금 싸웠던 건 까먹은 채 한참을 떠들었다.
"몇 시 영화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뒤로 그녀가 물었다. 나는 그녀를 살짝 돌아보며 대답했다.
"12시 반. 예매할 때 보니까, 자리가 거의 비어 있더라."
그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위해 매점을 무인으로 운영하는 영화관을 골랐고, 가장 늦은 시간대의 영화를 예매했다.
"시간이 남네."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우리 한강 갈래?"
"이 시간엔 사람이 좀 있을 텐데..."
"밖엔 못 나가더라도. 드라이브는 할 수 있잖아."
그녀도 그간 많이 답답했을 테지. 나는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오예~ 옷 갈아입고 나올게!!"
그녀는 만세를 부르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내가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식탁을 정리하고 이를 닦고 나올 때까지도 그녀는 옷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대충 청바지 위에 바람막이를 걸친 내 모습을 괜히 거울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건 데이트가 아니다.
"아직 멀었어?"
내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방에서 나왔다. 그녀도 딱히 엄청 꾸민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지? 싶었다.
그녀는 나를 보곤 마스크를 한 장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까 모자도 써. 사진이라도 찍히면, 얼굴이 안 나와야 해."
나는 그녀에게서 마스크를 건네받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한 번씩 그녀가 연예인이라는 걸 실감하고는 했다.
기껏해야 집 앞 편의점 정도만 왔다 갔다 했을 그녀는 오랜만의 외출에 잔뜩 신이 나 보였다. 내 차 블루투스에 자신의 핸드폰을 연결하고 원하는 노래도 크게 틀어 놓고 실컷 들었다. 대부분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 시끄러운 노래들이었지만, 나는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는 잠깐 내려 강변을 걷기도 했다. 나는 약간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녀가 흥얼대는 콧노래를 들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서 한 장면 한 장면 눈에 담으며 최대한 만끽했다.
영화관에 도착해서는 그녀의 소원대로 팝콘과 콜라도 샀다. 종종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지만,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얼떨결에 시작된 동거 후 처음 맞은 우리의 외출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제법 스릴도 있었고 영화도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살짝 흥분 상태였고, 그 늦은 시간, 맥주에 소주까지 사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이 비번이었던 터라,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아주 '밤을 찢어버릴' 기세였다.
우리는 씻고 나와 편한 차림으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별것 아닌 소소한 농담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그녀는 자신의 무릎 위로 발그스레해진 얼굴을 기댄 채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우리 고등학교 때 니가 미국으로 간 것도, 결국 형 때문이었던 거지?"
나는 그녀가 갑자기 꺼낸 이야기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이제 슬슬, 십여 년 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응."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미국 간다고."
"..."
그녀는 다 지난 일이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가엔 살짝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나는 니가 가고 나서야 알았잖아. 우리가 헤어진 게 니가 미국에 가야 해서였다는 거."
그녀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때 이야기를 꺼내곤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런 그녀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해."
내 사과를 들은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 지금이라도 네 입으로 말해줄래? 미국엔 왜 갔고, 그때 우린 왜 헤어진 건지?"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계속 피해온 건, 어쩌면 나조차도 아직 이 이야기를 꺼낼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단단하지 못했던 17살의 강윤재. 내 속에 있는 그 어린 애는 그때의 상처를 완벽히 치유하지 못하고 아직도 내 안 깊숙한 어디선가 웅크리고 앉아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더 피할 곳이 없다.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알게 되고 나서..."
형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의 분노를 쏟아낼 구멍을 만들어줄 목적이었지만, 형은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형을 서포트하기 시작했고, 형은 엘리트 선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형이 미국에서 훈련할 기회를 잡게 되었는데, 그건 단순히 한두 달짜리 연수가 아니라 끝나는 시점을 장담하기 어려운 프로 선수 활동이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형의 미래를 위해 한국의 모든 걸 빠르게 정리했고, 거기에 내 의견 같은 건 없었다. 고작해야 17살짜리 아들에게 의견을 물어볼 만한 여유는 없었던 거다.
내가 아버지에게 미국행에 대해 통보받은 건, 미국으로 떠나기 3주 정도 전이었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내 꿈이 있었다. 나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때 열심히 한 덕에 스카우터 눈에 띄어 좋은 기회도 얻은 상태였다. 아버지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확실했던 당시의 내 미래보다, 이미 일정 궤도에 오른 형의 커리어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혼자 한국에 남겠다고 우겨도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이미 결정된 일에 토 달지 말라는 호통뿐이었다.
축구도, 친구들도, 진영이도 다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형 때문에 왜 내가 희생해야 하냐'고 말했다가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열일곱, 서툰 첫 연애에 나는 정식으로 끝을 말하는 방법 따윈 몰랐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비겁하게도 침묵이었다. 나는 진영이에게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헤어지자 통보한 뒤 연락을 피했고, 제대로 끝도 내지 않고 그렇게 도망가듯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녀에게 제대로 된 이별을 말할 용기도, 그녀의 슬픔을 마주하고 견딜 자신도 없었던 나의 최악의 선택이었다.
미국에 간 이후 난 그곳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축구는 미국에서도 할 수 있지 않냐고 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피지컬적인 면에서도 당연히 따라가기 어려웠고, 영어도 잘 못했고, 당시는 지금처럼 한국이 유명할 때도 아니었으므로 인종 차별을 심하게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이도 싸웠고, 자연스럽게 안 좋은 친구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개방적인 그들의 문화 속에 숨어, 술과 담배를 배우고 처음 보는 여자와 밤을 보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내가 가장 망가졌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더 힘들어졌다. 한국이 그리웠고 진영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나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했고, 나는 일 년 만에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 내 옆으로 바짝 앉아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힘들었겠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라 잠시 얼어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내게서 휙 떨어져 나가며, 방금까지 따뜻했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얄밉다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근데 너는 그때부터 회피형이었구나?"
"어?"
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보았다.
"너 중학교 때도 내가 홍정의 좋아하는 줄 알고, 나한테 못된 말로 상처 주고 나 보기 어려워서 도망갔잖아."
"너 홍정의 좋아하는 거 맞았잖아."
"지금 핀트는 그게 아닐 텐데?"
나는 말을 돌리려다 실패하고 민망함에 눈알만 굴렸다.
"나 회피형 싫어. 피하지 마."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잔을 내려놓을 때는 표정이 한결 가라앉았다.
"내가 혼자 있어 보니 말야..."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알겠더라. ...미안해."
나는 훅 들어온 그녀의 사과에 잠시 멈칫했다. 대답을 하는 대신,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한 번에 비워냈다.
"나는 내가 바빠서 너를 못 만나는 게 미안하다고 그냥 막연하게만 생각했거든? 와, 근데 전에 니가 나랑 있다가 갑자기 긴급 출동 받아서 나갔을 때, 그땐 기분이 진짜 이상하더라구."
나는 며칠 전, 긴급 콜 때문에 급하게 집을 나섰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땐 방 안에 있던 그녀에게 다녀오겠다 인사도 못한 채였다.
"그리구... 어제, 아니지 이제 그저께지? 암튼... 너 다쳐서 들어온 날, 내가 저녁 준비하고 기다렸었잖아? 그날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다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 우리가 헤어졌던 날이 떠올랐어."
나는 빈 잔에 술을 채우다 그대로 멈췄다. 그녀의 말 한마디로 내가 그날로 강제로 소환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욱신거렸다. 지금 내 눈앞에 그녀가 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네가 미웠거든... 왜 날 이해해주지 못하나 하고 말이야."
그녀는 천천히 힘겹게, 하지만 확실하고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 참 간사하지. 막상 내가 기다리는 입장이 돼 보고 나서야 알았어."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힘들었겠더라."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잔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응. 힘들었어."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피하지 않고 그녀에게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기다리는 거도 힘들었지만, 그거보다도... 그 상황을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
그녀는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일을 줄이라고 할 순 없잖아. 니가 얼마나 힘들게 거기까지 갔는지 다 아는데."
나는 잔을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더라. 머리로는 다 아는데, 막상 약속이 취소되면 또 서운하고... 너도 힘든데 내가 티를 내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 새어 나오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나도 너 다쳐서 온 날,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 했었어. 그냥 그 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그건 그냥 내가 너를 잃을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거지... 너는 그 일을 좋아하고, 잘하고, 또 그 일을 하고 있는 게 지금의 너인 건데... 내가 걱정된다고 그만두라고 할 순 없는 거니까..."
그녀는 손끝으로 잔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네가 무슨 마음이었을지, 조금 알 것 같았어."
나는 그녀를 한동안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진지한 상황이 어색했는지 살짝 농담을 섞어 나를 타박했다.
"그래도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미안해."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사과했다. 그 사과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렇게 쉽게 사과를 뱉을 줄 몰랐는지 약간 놀란 듯 보였다.
"나도 그날 사실, 처음부터 헤어지자고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 니가 아무리 바빠도...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니 옆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을 했어야 했는데..."
내 말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잠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지만, 선뜻 손을 뻗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문질렀다.
"...그날 내가 너무 널 몰아세웠어."
그녀가 자신을 탓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너무 속이 좁고 예민했던 거지."
그녀는 아직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요즘 너무 행복하거든? 너랑 여기 있는 게 너무 좋아. 아침에 일어나면 네가 있고, 같이 밥 먹고, 네가 올 때를 기다리고..."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근데, 무서워... 내가 또 바빠지면... "
나는 그녀가 끝내 하지 못하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우리가 서로 또 지치고 미안해하는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운 거겠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헤어졌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겪어보지 않았는가. 그녀가 없던 지난 1년을.
"...나도 무서워."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없어지는 게 더 무섭던데."
"어?"
그녀는 내 말이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바로 후회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하고. 변명 같겠지만..."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가고, 오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 시간들이 떠올라서였다.
"...나는 나중에 내가 좀 덜 바빠지고 나면, 다시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땐 그냥 내가 너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네가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 보였으니까... 민유정이..."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뭐?"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민유정이 뭐."
그녀는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오물거렸다.
"...걔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나는 뒷목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왜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내가 잠든 사이, 민유정과 그녀가 통화했던 그날. 분명 민유정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