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image.png서비스 스틸컷 _ XXX_SOUND 진영 (본명 정진영)




43. 역지사지




병원에 들렀다가 가야 한다는 효범이의 주장은 내 고집을 꺾진 못했다. 딱히 봉합이 필요할 만큼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병원에 가봤자 드레싱만 하고 말 상처였다.


나는 사무실에서 효범이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응급조치만 마치고 바로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이미 시계는 9시가 넘어있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있던 그녀가 쪼르르 달려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밥은? 먹었어?"


그녀의 밝게 웃는 모습을 보자 하루 종일 고단했던 피로가 싹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걸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런데 밝게 웃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내 점퍼의 찢어진 부분이었다. 옷을 갈아입었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미처 생각을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얼른 내 옆으로 와 내 팔을 잡아 올렸다.


"다쳤어?!"


나는 슬쩍 팔을 빼내었다.


"아냐, 그냥 옷이 좀 찢어진 거야."


"피가 났잖아!"


"별거 아니야."


"벗어!!"


"어?"


"벗어보라고!!"


그녀는 아직 신발도 못 벗고 현관 앞에 서 있는 내게서 막무가내로 점퍼를 벗겨냈다. 그녀는 내 점퍼를 끌어내린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단숨에 상의 단추까지 풀어내고 있었다.


"야, 야, 야!! 잠깐만!! 아, 잠깐만!!"


당황한 내가 방어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속수무바카라으로 옷은 벗겨져 버렸다. 맨손으로 칼 든 괴한도 제압하는 내가 이 쪼꼬만한 여자애 하나를 못 이겨서 말이다.


그녀는 기어이 내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인상을 썼다.


"맨날 이렇게 다치는 거야?!"


"아냐, 오늘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야."


나는 주섬주섬 옷을 다시 입었다. 예전에 비슷한 얘기를 민유정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냥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었는데... 지금 나는 진영이가 내 걱정을 하는 게 싫지 않았다.


"저... 근데, 나 이제 좀 들어가면 안 될까?"


내 말에 그녀는 막고 있던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식탁 위에 잘 차려져 있는 저녁상이었다.


"어? 뭐야 저거? 네가 했어?"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골이 나 있는 표정인 그녀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병원은 안 갔어? 그거 꿰매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다니까.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봉합해야 할 정도면 피가 이렇게 빨리 멎지도 않아."


"그 정도로 다친 적도 있어?!"


그녀가 깜짝 놀란 듯 큰소리로 물었다. 나는 괜히 말했다 싶어 얼른 말을 돌렸다.


"저녁은? 먹었어?"


내가 애써 말을 돌리는 걸 알아챈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더 파고들진 않았다.


"아직... 나도 뭐 작업 좀 하느라. 너는 먹었어?"


나는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식탁을 바라보았다. 놓여 있는 밥은 두 공기. 혼자 먹겠다고 차린 상은 아닌 듯 보였다.


"혹시... 나 기다렸어?"


내가 묻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 숙였다. 나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나를 기다리며 상을 차려놓은 그녀를 생각하니 미안해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나 얼른 손만 씻고 올게. 같이 먹자."


내가 점퍼를 의자에 대충 걸어두고 서둘러 욕실로 향하는 사이, 그녀는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냄비를 가져가 다시 데웠다.


저녁 9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사실 음식은 진짜 맛이 없었다. 국은 엄청나게 달았고, 어묵 조림은 혀가 아리도록 짰다. 난 그녀가 필시 소금과 설탕을, 양조간장과 국간장을 구별 못 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계란말이는 아무 맛이 나지 않아 먹을만했다.


그녀도 자신의 요리를 한 입 먹어보고는 인상을 썼다.


"윽. 이게 뭐야... 미안. 내가 요리는 영 소질이 없어."


그녀는 시무룩하게 기가 죽었다. 나는 얼른 국에 밥을 말았다.


"맛있는데? 나 단 거 좋아해."


"...억지로 먹지 마."


"아냐, 진짜 맛있어."


"그럴 리가 있어?"


"진짜래도. 원래 남자들은 맛 이런 거 잘 몰라. 다 맛있어."


"...그래?"


나는 그녀가 만들어준 밥을 남김없이 모두 비웠다. 절대 억지로 먹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맛보다 그녀가 나를 위해 처음으로 밥을 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서 벽돌도 씹을 기세였다.


물론 다음부턴 그냥 내가 밥을 해서 먹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진짜 아주 잠깐 하긴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재활용 좀 버리고 올게."


나는 담배를 피울 핑곗거리를 손에 쥐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분리수거를 하고 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그리고 문득 아까 메시지가 왔던 것이 기억이 나 뒤늦게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응. 괜찮아.] [저녁은? 먹었어?] [많이 늦어?] [혹시 출발할 때 연락할 수 있어?] [바빠?]


시간 간격을 두고 와 있는 여러 개의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집에서 저녁상을 봤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 나를 덮쳤다.


나는 담배를 빠르게 두어 차례 깊게 빨고 내뱉으며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 먹먹한 기분이 정확하게 뭔지 잘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미안함? ... 그 말로는 무엇인가 부족했다. 그저 지금은 그녀가 혼자 있을 집으로 빨리 들어가야 한단 생각에 발을 서둘렀다.


우리는 그날 밤에 그녀가 보고 싶다던 드라마를 함께 보았다. 그녀는 주인공들에게 몰입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조잘댔다. 평소에는 드라마 같은 걸 잘 보지 않는 나지만, 둘이 함께 보니 나름 재미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옆으로 돌아눕기 위해 몸을 돌리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방이 아니었다. TV도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전날 밤 드라마를 보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내 바로 뒤 소파 위에는 그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그녀를 보았다. 평온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 옆으로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잘 참았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가져다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살포시 눈을 떴다.


"...몇 시야?"


그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직 여섯 시 반이야. 방에 들어가서 더 자."


그녀는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볐다.


"...벌써 출근해?"


나는 그녀가 앉아있는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았다.


"아직."


"...오늘도 늦어?"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자, 어젯밤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 밀려왔다.


"너는 나 출근하고 나면 뭐 해?"


나는 그동안 내가 없는 집에서 그녀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 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잘 있겠거니,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그녀가 저녁도 먹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지금 혼자 어딜 함부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걸 떠올렸다.


"나? 나는 음... 홈트 하고, 바카라도 읽고..."


"혼자 심심하지는 않아?"


내 질문에 그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심심하지. 기타도 치고 싶은데, 여긴 오피스텔이니까... 뭐 애초에 가지고 오지도 않았지만."


"오늘은? 뭐 해?"


"오늘도... 홈트 하고, 바카라 읽고... 아 어제 보던 드라마나 마저 볼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가 벌써 우리 집에서 지낸 지 8일째였다. 나는 내 무신경함을 자바카라했다.


"오늘 나 퇴근하고 나서 같이 밖에 나갈까?"


내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산바카라' 소리를 들은 강아지같이 말이다.


"진짜?!"


"뭐 대단한 건 못 하겠지만,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거 생각해봐."


나는 슬슬 씻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뒤로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 그럼 영화 보고 싶어!"


나는 뒤를 돌아봤다.


"영화? 자동차 극장?"


"아니 진짜 리얼 극장. 팝콘이랑 콜라두 사 먹을 수 있는 진짜 영화관.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이런 영화관."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준 오빠가 그러는데, 심야 영화 상영할 때 가면 생각보다 사람 없대. 뒤쪽에 앉으면 된대!"


"서정준?"


나는 그녀를 이상형으로 꼽았던 남자 배우를 떠올리고 인상을 썼다. 정준 오빠? 성은 왜 떼고 부르는 거야. 아니 그리고 그 사람이랑 따로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거야?


"어. 그러니까 가자. 가 보고 싶어. 영화 시작하고 살짝 들어가서 맨 뒤에 앉자. 응?"


그녀는 정말 그 '정준 오빠'가 자신을 꼬드기려고 한 말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나는 속으로 괜히 부글부글했다. 이젠 남자 친구도 아닌 주제에 질투가 웬말인가 싶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응? 가자, 응?"


그녀는 어느새 내 뒤에서 내 팔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귀엽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뭐 절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가자."


내 말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다시 소파로 가며 신이 나서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공포 영화 어때? 8번 출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는 무서운 건 딱 질색이다. 예전에 그녀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던 걸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이불킥 각이다. 그녀는 소파에 엎드려 본격적으로 상영 중인 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나우 유 씨 미 3? 프레데터? 오, 퍼스트 라이드도 아직 하네! 이건 얼굴 천재가 나오지!"


나는 씻으러 가려던 몸을 돌려 그녀 옆에 다시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핸드폰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누구 나오는데?"


"차은우 선배님!"


"나우 유 씨 미 3 보자."


"그것도 좋아!!"


그녀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런 작은 것에도 신이 난 그녀가 안쓰러웠다.



.

.

.




"나 오늘은 진짜 일찍 가야 돼."


내가 서류 더미를 효범이의 바카라상에 내려놓자 그는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게 항변하듯 투덜거렸다.


"아, 강 경위님~! 독박이라니요! 이건 아니죠!!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야, 너 전에 김철웅 잡았을 때. 너 여자 친구 왔다고 해서 내가..."


"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아, 조용히 해요."


효범이는 내 말을 끊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씨익 웃었다. 내가 잠바를 걸쳐 입고 있을 때 팀장님이 안마봉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효범이 바카라상 앞으로 다가왔다.


"너는 보고서를 읽으라고 쓰는 겨, 알아맞히라고 쓰는 겨?"


그리고는 효범이 바카라상 위 서류 더미를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뭐여, 이야~ 벌써 다 떠넘긴 겨? 참 부지런도 햐."


"아닙니다."


"뭘 맨날 그렇게 아니랴? 우리 효범이는 보고서 쓰는 연습이 필요하긴 햐. 어이 진효범이. 너는 나중에 우진이헌테 밥이라도 한 번 사라고. 너 연습하라고 선배가 이렇게 일까지 다~ 넘겨주잖어?"


"아, 팀장님~~~"


효범이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내밀었고 나는 그런 둘을 보며 피식 웃었다. 팀장님은 나를 슬쩍 보고는 내 어깨를 툭툭 내려쳤다.


"웃으니께 좋네. 좋아. 그래 퇴근햐."


나는 팀장님께 간단히 목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걱정을 끼쳤는지는 그의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간의 내 행동을 조금 반성했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땐 내게 아직도 어린애 같은 면모가 남아있다는 걸 깨닫는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강우진!!"


문을 열다 말고 돌아보니 민유정이 화가 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게 따지고 들었다.


"너 뭐야! 연락도 안 되고!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킬 거야?!"


그녀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이미 잠금이 풀려있는 현관문을 벌컥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야!"


내가 잡으려고 했지만, 민유정은 이미 현관 안으로 들어선 상태였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진영이가 서 있었다.


"...? 니가 왜 여기 있어?"


민유정의 말에 진영이의 눈썹이 꿈틀하고 한 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민유정은 늘 우리 집을 제 집처럼 벌컥벌컥 잘 들어오는 애였으므로 지금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민유정이 나를 홱 돌아보았다.


"니들 다시 만나?!"


"나와."


나는 민유정의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이 닫히자 그녀는 자신의 팔에 힘을 주어 홱 빼내었다.


"쟤가 왜 니네 집에 있냐고!"


나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니가 상관할 일 아니야."


민유정은 분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쟤만 끼면 꼭 이런 식이야. 너랑 나 사이에 자꾸 없던 벽이 생긴다고! 저 기집애 때문에!"


나는 소리 지르는 민유정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정아. 지난번에도 말했지, 선 넘지 말라고. 우리 이제 애들도 아니잖아. 왜 자꾸 내 사생활에 관여하려고 해."


그녀는 내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유정이가 상처를 받게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딱 잘라 그녀를 밀어내지 못한 게 오히려 문제였다. 내 우유부단한 행동 탓에 유정이도 진영이도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민유정은 내게 동의를 구하듯 자신의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붙잡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매일같이 형이 나를 때릴 때, 내 팔을 잡아끌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던... 그 손이었다. 나는 그런 유정이의 손을 살포시 떼어냈다.


"걱정시킨 건 미안해. 아줌마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드릴게."


내가 그녀를 뒤에 둔 채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자, 그녀는 내 등 뒤로 소리를 질렀다.


"그깟 여자애 하나한테 미쳐가지고!!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해!!"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닫고 잠시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들어 진영이를 찾았다. 일단, 거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닫혀있는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가 묵고 있는 방 문 앞으로 가 살짝 노크했다.


"...진영아."


"들어오지 마."


나는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방 문을 열었다. 그녀는 침대에 엎드린 상태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보곤 베개를 집어던졌다.


"...들어오지 말랬지!!"


나는 그녀가 집어던진 베개를 집어 들었다. 화가 나면 이렇게 뭘 집어던지는 버릇은 좀 고쳐야 할 것 같단 생각을 잠시 했다. 내가 다가가 말없이 베개를 내려놓자 그녀가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집에 자주 들락거렸나 봐? 들어오는 게 아주 자연스럽던데? 하긴. 둘이 아주 대단한 사이시니까. 아주 눈물겨운 우정이지.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걔! 니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아무렇지 않게 만지고. 너랑 나랑 사귀는 거 뻔히 알면서 내 앞에서 너에 대해 막 다 아는 척하고!"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하긴,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이렇게 화내는 것도 참 웃겨. 내가 너한테 뭐라고. 그냥 얹혀사는 주제에."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비하하며 깎아내리는 말을 더 듣고 있기는 어려웠다.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녀는 나를 노려보았다.


"왜? 민유정 욕하니까 듣기 싫어!?"


"그런 거 아니야."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웃겨 정말. 그거 다 위장이라고. 민유정 걔는 분명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그리고 너도 다 알면서 모른 체하는 거잖아."


나는 약이 올랐다. 자기도 공현이랑 친하지 않던가? 나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고, 머리를 쓸어 넘기고 했던 장면들이 떠오르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너도 남사친 있잖아. 아, 걔는 그냥 동료 사이라고 둘러대려고?"


"뭐?"


"공현우. 걔는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같던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나는 지금 내가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기 어려웠다.


"됐다. 관두자.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나도 너랑 나랑 왜 이런 걸로 싸워야 되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무슨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녀가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라고 정의하자 나도 괜히 오기가 생겼다.


"어. 그렇지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지. 니가 공현우랑 뭐 사귀든지 말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어!! 상관하지 마!!"


"어! 안 해!!"


나는 신경질이 나서 그대로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내가 나가는 걸 보고는 성큼성큼 와서 내 뒤에서 방문을 아주 세게 쾅 하고 닫아버렸다. 나도 씩씩거리며 내가 쓰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우리는 둘 다 그렇게 유치함의 끝을 달렸다.


월, 목 연재
이전 12화처음 해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