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image.png서비스 스틸컷 _ 민유정 29세, 인플루언서




47. 확증편향




그 후 며칠간 진영이는 병원에 오지 못했다. 소속사에서 열일을 하는 건지 자극적인 기사는 많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밖에는 기자들이 있었고, 나도 당장 김기태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쓸쓸할 틈 같은 건 없었다.


"강 경위님, 민유정이라는 사람 아시죠."


피해자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 나를 찾은 효범이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나는 깜짝 놀랐다.


"민유정? 왜?"


"혹시 진짜 옛~날에 한 번 경찰서로 옷 가져다주셨던 그분 아닙니까?"


"그럴걸?"


"씁... 그게... 김기태 통화 목록에 민유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보니까, 이 사람도 김기태나 경위님하고 같은 학교 출신이더라고요? 그분 맞는 거 같은데..."


나는 효범이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유정이가 우리 집에서 진영이를 보고 간 뒤 김기태가 나타났다.'


나도 사실 그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럴 리가... 나는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려고 하는 많은 것들을 애써 무시했다.


"사실 김기태 폰에는 다른 동창들 통화 기록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뭐 별거 아니겠다 싶긴 했거든요? 아 근데 이게... 씁... 제가 그냥 뭔가~ 좀 이상하게 찝찝해서요. 뭐라고 딱 짚을 수 없는 찝찝함이랄까? 경위님 친구분이라 조심스럽긴 한데..."


효범이는 아까부터 말을 제대로 못하고 괜히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단순히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만으로 유정이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성급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만 가지고 내게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알아보니까 김기태 출소하기 전에 면회했던 기록이 있더라고요? 그것도 여러 번."


"뭐? 언제?"


"가장 최근에 간 건 작년 11월 말이요."


순간적으로 귓가가 멍해졌다.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있던 작은 의심의 조각들이 점점 형체를 갖춰가고 있었다.


작년 그맘때쯤이면, 동창회를 하고 난 직후였다. 김기태가 우리 중 누군가와 연락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민유정일 거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유정이일 수도 있다는 걸.


"그럼 조영우를 통해서만 진영이를 알아본 게 아니라, 애초에 민유정이 정보원이었을 가능성도 있겠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뭔가 좀 이상하죠? 김기태 이 새끼. 조영우한테는 공중전화까지 쓰는 치밀함을 보였는데, 민유정한테는 그냥 자기 번호로 걸었어요.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효범이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진짜 그냥 일반 전화들 속에 묻어서 티 안 나게 하려고 한 걸지도 몰라요. 저도 사실 뒤져볼 생각을 처음부터 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와, 그런 거면 이 새끼 나름 머리를 쓴 거네요."


나 역시도 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2년 전, 망원동 모녀 살인사건을 수사하며 김기태의 통화 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봤을 때도, 수많은 동창들 중 하나로 그저 가끔 연락하는 사이겠거니 했으니까. 그때도 민유정에게 '왜 김기태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녀의 사생활이고, 내가 그 선을 굳이 넘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기태와 민유정.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이렇게 한데 묶이는 꼴을 또 보게 되다니.


김기태는 학교 다닐 때 아주 유명한 양아치였다. 소문으로 듣기에 그는 보육원 출신이라고 했고 어릴 때부터 거칠고 통제가 되지 않아서 선생님들도 골머리를 앓았다.


초등학교 때는 그가 학교에서 키우는 토끼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는 토끼가 재수 없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는 애들도 있었다. 사실 증거도 없이 떠도는 소문일 뿐이었지만, 모두가 그놈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며 믿을 정도였다.


중학생이 되고서도 다른 지역 애들과 어울리며 오토바이를 타거나, 싸움을 하는 등 나쁜 짓만 하고 다녔는데 그런 김기태가 민유정에게 꽂혀서 한동안 따라다녔다.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민유정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선물 공세도 퍼부었다. 유정이 말이라면 그게 뭐든 들어 줄 기세로 그녀를 떠받들며 말이다. 유정이 눈 밖에 난 애들은 김기태의 표적이 되었고, 그런 그의 행동은 유정이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결국 둘은 사귀는 사이가 되었고, 그녀는 학교 안에서 김기태가 가진 힘이나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에 심취해 그와 같이 어울리며 한동안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


나는 오래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마주하지 않고 피하며, 그렇게 눈감아 버린 것들이었다.



***




[2009년 6월]


"야, 민유정! 정신 좀 차려 봐!"


나는 담벼락에 기대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유정이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녀에게서는 향수 냄새, 담배 냄새, 술 냄새 등 중학교 1학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냄새들이 진동했다. 요즘 그녀는 자꾸 엇나가고 있었다.


"야!! 정신 안 차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똑바로 서게 했지만, 그녀는 술에 취해 비틀대며 내 팔을 뿌리쳤다.


"너 뭐야, 꺼져."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또 주저앉았다. 나는 그렇게 밀쳐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뛰어가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이렇게 술에 취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꼴이라니... 보나 마나 이건 분명 김기태 짓이다. 그 새끼가 애한테 술까지 먹인 거다. 나는 이를 갈았다.


그 새끼는 이렇게 취한 애를 길바닥에다 버려두고 어디 간 거지?


"야! 손 안 놓냐? 니가 뭔데 내 여자친구 팔을 잡고 지랄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속으로 욕을 하기 무섭게 김기태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다가왔다. 녀석도 비틀거리는 꼴이 꽤나 취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지 않고 김기태에게 바짝 다가갔다.


"...니가 쟤 술 먹였냐?"


"내가 먹이지, 그럼 누가 감히 내 여친한테 술을 먹이겠냐?"


나는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았다.


"미친 거야?"


"킥... 하긴 씨발, 니가 뭘 알겠냐."


그는 나를 비웃듯 실소를 내뱉더니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 쟤는 술에 떡이 되면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해주거든. 그게 뭐든."


"이 미친 새끼가!"


나는 그 새끼의 더러운 말을 더 들어줄 수가 없어 결국 참지 못하고 김기태에게 주먹을 날렸다. 녀석은 내게 한 대 맞고는 지 발에 걸려 넘어졌다. 이미 술을 마시고 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눈 탓이었다.


"야! 니가 뭔데 얘를 때려! 너 뭐라도 돼!?"


민유정은 내게 소리를 지르고 비틀거리며 김기태에게 다가갔다. 나는 쓰러져 있는 김기태를 놔두고 민유정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아줌마 기다리셔."


"안 가! 이거 놔! 니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뭘 하든, 신경 끄라고!"


나는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민유정을 붙잡고, 그녀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거는 내내 민유정이 나를 발로 차고 때리고 꼬집었지만, 나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민유정의 부모님은 그날 처음 김기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결국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손에 집으로 끌려가 애지중지 기르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렸다. 그리고 나는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죄바카라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그 후에도 계속 반복되었다.


그녀의 집에서 김기태와의 연애를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반항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툭하면 집을 나갔고, 그럴 때마다 유정이의 어머니는 매번 우셨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유정이가 가출을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도와 그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성이 나쁜 게 아니라, 친구를 잘못 사귄 거니까. 내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데리고 오면 된다. 그렇게 믿었다.


김기태와는 자연스럽게 앙숙이 되었다. 김기태는 민유정에게 나 같은 '남사친'이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했고, 나는 민유정을 나쁜 길로 계속 끌고 가는 그 양아치가 싫었으니 서로 만나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으르렁댔다.


그러다 그해 11월. 민유정은 김기태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김기태와 헤어졌다.


그 후 유정이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김기태는 그렇게 쉽게 물러나는 놈이 아니었다. 김기태는 계속 유정이에게 집착했고, 나는 그녀가 김기태를 정리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도왔다.


그녀가 필요하다고 하면, 김기태 대신 내가 그녀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녀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갔다. 나는 '그 사고'로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속상해하는 유정이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팠고, 그땐 그게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다 유정이와 김기태가 헤어지고 몇 달쯤 지난 뒤, 하교하던 길 주택가 담벼락에 낯익은 실루엣이 기대 서 있는 게 보였다. 입에 담배를 문 채 불량하게 서 있는 김기태였다.


학교 근처에서 교복을 입은 채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그 자식을 보며 나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못 본 척 그냥 그 옆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강윤재."


그가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나는 발을 멈추었다. 김기태는 담배를 바닥에 던진 뒤 발로 비벼 끄며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동안과는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뭐?"


"유정이가 나 버린 거. 전부 다 니 탓이라고."


김기태에게서는 알싸하고 톡 쏘는 냄새가 났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너 이제 하다 하다 본드까지 손대냐? ...하. 아니다.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지."


하지만 그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유정이랑 헤어질 일은 없었어."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어딘가 텅 비어 보였고, 가라앉아 있었다.


"니가 애를 어디까지 끌고 내려갔는지는 생각 안 하냐?"


내 말에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건 우리 둘 사이 일이고, 니가 끼어들 게 아니지. 내가 똑똑히 기억해둘 거야. 니가 나한테 한 짓."


나는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 그 녀석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 니가 민유정이랑 헤어진 건 다 니 자업자득이야. 내 탓 하지 마."


나는 그가 달려들면 언제든 받아칠 준비를 했지만, 그는 내 말에 피식 웃고는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래. 자업자득이지. 근데, 똑똑히 기억해라. 내가 언젠가 너한테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때 너도 느껴 봐. 그게 어떤 느낌인지."


나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저 비뚤어진 허세와 허풍이라고만 치부했다. 실제로도 그가 내게 협박처럼 경고했던 것치고는 한동안 조용하기도 했다. 그는 딱히 내 눈에 띄지도 않았고, 내 신경을 긁지도 않았으므로 나 역시 김기태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된 후로 유정이는 정말 달라졌다. 학원도 열심히 다녔고, 성적도 눈에 띄게 올랐다. 담배 냄새나 술 냄새도 더는 나지 않았다. 유정이의 집도 다시 화목해졌다.


그래서 나는 민유정이 그 이후 김기태랑 따로 만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냥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둘이 같이 있는 걸 아예 못 본 건 또 아니었으니까.


하루는 학원 끝나고 집에 가다가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유정이를 보았다. 반가워서 부르려고 손을 번쩍 들었는데 누군가 그녀의 곁에 다가오는 걸 보고는 손을 내렸다. 김기태였다.


유정이는 김기태가 내미는 쇼핑백을 받아 들었고, 둘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 보였다. 나는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 유정이가 김기태를 보고 웃어주는 걸 보고는 참지 못하고 유정이를 불렀다.


"민유정!"


내 부름에 그녀가 나를 발견하곤 아주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나를 발견한 김기태는 내가 길을 건너는 동안 자리를 떠나버렸고, 나는 남아 있는 민유정에게 다가갔다.


"뭐야, 너? 쟤랑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


내가 인상을 쓰자 민유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연락은 무슨. 우연히 그냥 만나서 잠깐 얘기한 거야."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쳐다보는 것을 느낀 그녀는 그 쇼핑백을 슬쩍 뒤로 숨겼다.


"그건 뭔데?"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따져 묻자, 그녀가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그냥 뭐 별거 아니야."


"김기태가 준 거야?"


"아니? 걔가 이걸 왜 줘! 내가 산 거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따져 묻진 않았다. 헤어진 마당에 김기태가 계속 질척거리는 모양이지 했다.


2학년 때는 김기태와 부딪힐 일이 별로 없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때도 그는 특별히 내게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았고 나 역시 민유정만 아니면 딱히 엮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우리 사이에 마찰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3학년이 되고 공교롭게 같은 반이 되었지만, 녀석은 학교를 밥 먹듯이 빠지는 편이었고, 어쩌다 학교에 나와도 늘 잠을 자거나 수업을 째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교실에서도 내게 시비를 건다거나 한 적은 없어서 그와의 인연도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진영이에게 고백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처음 데이트를 신청했던 그날. 나는 영화관에서 김기태를 마주쳤다.


"야, 밖에서 보니까 반가워서 그렇지. 게다가 니가 웬 여자랑 있잖아. 호기심이 막 생기지 않겠냐?"


그 자식의 말에서 적의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가 매번 나와 민유정의 사이를 질투하고 의심하곤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너 때문이야'라고 했던 그의 말도 기억이 났다.


진영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진영이를 그 새끼가 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몸을 옆으로 조금 더 틀며 그녀 앞을 막아섰다.


"정진영? 음, 정진영... 니 이름이 정진영이야?"


나는 그 새끼의 입에 진영이 이름이 오르는 게 소름 돋게 싫었다. 나는 진영이가 듣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욕을 내뱉었다.


"니들이 언제부터 나랑 인사하고 지낼 만큼 친했다고 말을 붙이고 지랄이야. 개소리 말고 그냥 꺼지라고."


그는 내가 자신의 도발에 넘어간 게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뭐 씨발, 말 좀 걸면 닳아 없어지냐? 이 새낀 맨날 존나 비싸게 굴어. 재수 없게, 씨발 새끼가."


그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나를 노려보았으므로 나는 여차하면 진영이를 데리고 튈 생각으로 준비를 했다. 조영우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어 김기태를 말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의 첫 데이트가 엉망이 됐을 것이다.


"쟤들은 앞으로 마주쳐도 무시해. 특히 방금 조영우 앞에 있던 걔는 더욱더."


나는 그녀에게 김기태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고, 일단은 그녀도 알아들은 듯 보였다.




***



그날 그 자리를 벗어난 뒤에도, 진영이를 훑어보던 그 자식의 눈빛만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김기태가 진영이를 보던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들짐승 같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는 유정이 일로 쌓인 나에 대한 악감정을 그녀에게 옮겨 붙인 게 분명했다.


'내가 언젠가 너한테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의 말은 저주처럼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니며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렇게 눈감은 불안은 해를 거듭하며 이자가 붙었고, 그 값을 나는 이제 한꺼번에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민유정이 얽혀 있다니...


"경위님? 경위님. 괜찮으세요?"


효범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효범이를 보았다.


"어, 미안. 잠시 딴생각했어. 뭐라고?"


"민유정 쪽은 지금 연락이 안 돼서, 참고인 조사 요청 넣어놨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경위님 여자친구분도 현장에 계셨던 목격자라..."


효범이가 한참 말을 하고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진통제 좀 더 넣어드릴게요~"


나는 효범이가 하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연예인 신분으로 경찰서를 오고 가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미 이슈가 되고 있는 마당에 기자들에게 먹이를 더 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목격자 진술을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효범이가 소속사와 접촉해서 직접 회사로 가든, 따로 장소를 잡든 하면 된다. 그래, 하나씩 차근차근 하면 된다.


일단은 여론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였다. 경찰 조사는 우리 쪽에서 가면 되고, 당분간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회사에서 잘 막아주겠지. 시간이 지나면 여론은 금방 가라앉을 거다. 보고 싶어도 당분간만 조심하면...


"윤재야!!"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녀가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요란한 등장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아파? 어디 좀 봐봐."


내 곁에 서 있던 간호사가 링거를 만지작거리면서도 곁눈질로 계속 그녀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일단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사이 효범이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또 뵙네요!"


효범이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 새끼는 눈치가 있는 것 같은데, 또 없다.


"아, 안녕하세요. 진효범 경장님. 그날 정말 감사했어요."


"와! 제 이름도 기억하세요!?"


"그럼요. 제가 얼굴은 잘 못 외워도, 이름은 잘 외우거든요."


죽이 잘 맞는 듯한 두 사람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을 때 간호사가 그들의 대화를 멈춰주었다.


"다 됐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6시에 회진 오실 거예요. 진통제는 일단 더 넣어드렸는데, 혹시 계속 아프시면 벨 눌러주세요."


"많이 아파!?"


간호사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녀가 다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대꾸하는 건 잠시 미뤄두고 간호사에게 인사를 전했다.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는 눈동자를 굴려 나와 그녀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병실 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간호사가 빠져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나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여길 왜 와!"


내가 그녀에게 핀잔을 주는 걸 본 효범이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슬쩍 병실 문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효범이가 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와락 안았다.


"무서웠단 말이야. 니가 잘 회복하는 중이라는 건 기사로 전해 들었지만, 내가 꼭 봐야 했어."


그녀가 콱 끌어안는 바람에 순간 배가 당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남은 한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아주었다. 나 역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게 계속 울던 모습이었으니 그녀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던 그녀를 잠시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에는 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살짝 훔쳤다.


"괜찮아. 보다시피 멀쩡해. 수술도 잘 됐대. 예쁘게 꿰매주셨다고 했어."


"이게 뭐가 멀쩡해! 너 죽을 뻔했대!"


그녀는 결국 맺혀 있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지 마. 진영아... 못생겨져."


내 농담에 그녀는 인상을 쓰고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아직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기태가 거길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내 뒤를 밟았나 봐. 나 때문에 너까지 다치고..."


그녀의 말에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이 일이 전부 그녀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말을 해줘야 한다. 이 모든 건 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민유정의 얘기도 꺼내야 했으므로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다. 일단은 유정이 얘기를 먼저 듣고, 상황을 정리한 뒤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네 탓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보다, 기자들은 어쩌고 들어온 거야?"


"몰라. 찍으라지. 어차피 다 걸렸어."


그녀는 자신의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대바카라 없음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 깁스한 팔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팔도 부러졌던데. 나쁜 놈.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내가 그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죽일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또 한 번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걱정을 끼친 게 미안하면서도... 또 그녀가 걱정해주는 이 상황이 좋기도 한, 그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죽이긴 뭘 죽여.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긴 뭐가 괜찮아! 경찰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위험한 직업인 거야? 일주일도 안 돼서 벌써 두 번째잖아! 이거 꼭 해야겠어, 진짜?!"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며 여유를 부리면 안 된다. 이러다 일 못하는 수가 있다. 말을 돌려야 한다.


"아냐, 원래는 이런 일 진짜 없어. 진짜야. 그거보다 나는 기자들이 더 걱정인데."


나는 진땀을 빼며 말을 돌렸고, 다행히 그녀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걱정 마. 여론은 우리 편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내게 자신의 SNS를 보여주었다. 거기엔 그녀가 직접 켰던 라이브 방송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그녀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 속에는 화장기 없이 모자를 눌러 쓴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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