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Altus Solum_Achive

byAltusSolum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늘 그랬다. 다만 인지하지 못했을뿐..


나는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단한, 고난도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궤도에서 조우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벅찬 문제를 사력을 다해 풀어내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처럼..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하게, 예의를 갖추어 소중하게 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서로에게 기울이는 그 정성과 존중이 슬롯와 공동체의 격을 만드는것이 아닐까?


지금말로 하면 나는 엄청난 온라인 게임 내 괴롭힘을 당했다. 갑질상사를 첫 과장으로 만났었다. 입사 후 교육도, 동기도 없이 그 꿈의 온라인 게임을 다닌지 한달 만에 머리에 빵꾸가 3개가 났다. 그마져도 몰랐는데 미용실 거울 너머로 엄마와 미용사 언니의 눈짓을 보고 알게 되었다. 살면서 아무 이유없이 누구한테 덮어놓고 미움받고 구박당한게 처음이라, 그 낯선 폭력 앞에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은 나한테 왜 이럴까? '내가 문제가 있는건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내가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지옥 같았던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곁에 있던 '좋은 동료들' 덕분이었다. 구제불능인 상사 한 명의 폭력을 견디기 위해, 여섯 명의 동료가 서로를 전담 마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시간이 좀 지나서 그 과장 자신보다 고위급의 상사들이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칭찬하자, 그 사람은 태세를 전환해 좋은 사수인 척 얼굴을 바꿨고, 나는 그 기만마저 묵인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다. 지난 시간동안 회사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동료간의 협력과 상사에 대한 인식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신고라는 것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 내가 더 약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봐야 그 상사한테 젤 먼저 그 소식이 들어갈테니까.. .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심하게 당한 사람들이 한명씩 늘어가고, 시대가 변하면서 그 사람은 알아서 도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 그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료, 선후배들이 참 좋은 분들을 만났다. 사람은 결국 사람속에 성장하게 되는거라, 내가 그 조직에서 얼마나 억울한 일을 더 당해도 내가 잠시라도 몸담았던 그곳에 침뱉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만큼 난 운이 참 좋았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가엽게 여기고, 설사 머리로 이해를 한다해도 아프지 않은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그렇게 켜켜이 감싼채로 사는거지 100% 말끔하게 상처가 아무는게 아니다. 괴롭힘이라는것은 삶에 지독한 내상을 남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 슬롯의 고질적인 '강약약강'이라는 화두를 꺼내고 싶다. 왜 그토록 비열할까?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 당해도 되는 사람이 정해져 있던가? 왜 어떤 사람의 죽음은 널리 알려지는데, 어떤 이의 죽음은 수면 아래로 잠겨버릴까? 분명히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있고, 함께 부대끼며 일상을 공유하던 구성원들이 있는데.. 왜 그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한 예의는 갖추지 않는 것일까? 지금처럼 사람을 생명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당연해지면, 결국 내 부모도, 내 자식도, 내 친구도, 나도 그렇게 취급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수십 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이 통계가 가리키는 진짜 비극은 죽은 자들의 숫자가 아니다. 서투른 애도의 문화속에 억울함과 환멸을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상실의 생존자'들과 유가족이 그만큼 우리 곁에 빽빽하게 밀집해 있다는 뜻이다.


이 거대한 상실의 밀도 앞에서 국가의 태도는 기만적이다 못해 위선적이다. 국가는 '저출산'을 국가적 재난이라 부르며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을 늘리는 데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는다. 취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자들이 꺼져가는 이곳에서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증가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인간을 존엄한 목적이 아니라 머릿수와 소모품으로만 대하는 현실의 민낯이다. 태어날 생명에 집착하기 이전에, 이미 태어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생명들을 보듬고 지켜내는 것이 국가와 슬롯의 가장 1차적인 바카라무다.


평소 구성원의 뼈 깎는 고통에는 철저히 눈감던 조직이, 비극이 터지고 언론의 눈치가 보이자 그제야 대바카라 위원회니 TF니 하며 요란을 떤다. 사후약방문식의 이 가식적인 요란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력을 다해 버티는 산 자들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폭력이다. 벼랑 끝에서 간신히 출근하는 이들에게 끔찍한 무언의 경고를 날린다. 새삼스럽게 안 하던 짓을 하며 거창한 위원회를 급조할 시간에, 당장 마땅히 해야만 했던 일들—말없이 시들어가고 있는 곁의 사람들을 살피고 실질적인 보호막을 가동하는 일—, 하지만 안했던 일들을 이제라도 하는 것이 먼저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각자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그런 시스템으로 진화시켜나가는 일을 하면된다.


이러한 행정의 기만은 사람을 대체 가능한 소비재로 취급하는 현대 슬롯의 병폐와 맞닿아 있다. 하물며 연인 간의 이별조차 그렇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힌다"는 가벼운 위로 속에는, 내 삶의 일부를 공유했던 고유한 타인을 언제든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시대의 폭력성이 숨어 있다. 타인이 내 안에서 완전히 죽고 제대로 된 애도를 마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사람을 만난 만큼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제대로 떠나보내기 위해 기꺼이 앓아내는 그 고통스러운 애도의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결코 다른 부품으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가장 숭고한 저항이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할 공적인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서둘러 덮어버리려는 조직의 태도는, 인간을 그토록 쉽게 업신여기는 이 가벼운 시대의 축소판이다.


우리 슬롯는 살아 숨 쉬며 일터에 출근하는 사람들은 '정상'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곧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조금씩 다 고장나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현실의 궤도 위로 자신을 올려놓고,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혹은 아주 작은 희망의 파편이라도 쥐고 다시 한번 묵묵히 '사는 것'을 선택한것이다. 모두 말끔하게 괜찮아서가 아니라, 사력을 다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결단은 훨씬 더 고단하고 험난한 길을 걷겠다는,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위대한 용기다.


진정한 애도의 목적은 결국 '산 자를 지키는 일'이어야 한다. 산 자의 치열한 생존을 모욕하지 마라.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때 하는 것. 사람을 부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 유일함을 끝까지 존중하는 것. 오늘 하루를 살아내겠다는 그 무겁고 눈물겨운 결단을 내린 이들의 손을 굳게 맞잡는 것. 그것이 환멸의 시대를 건너며 사수해야할 인간 존엄성의 마지노선이다.

우리는 전쟁통에도 누군가를 위해 밥을 만들고 둘러 앉아 같이 먹었던.. 그랬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