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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곧 마음이다."
최근 읽은 바카라 중 가장 재미있었던 김정운 교수의 신간 <말하지 않고 말하기>의 한 대목이다.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교수'님이 아니다. 싫은 건 그만두고, 끝없이 공부하고, 용기 있게 의견을 말하는 '지식인'다운 사람이다. 뭇 젊은이들보다 더 자유로운 소년의 호기심과 에너지를 가진 그가 쓴 이 바카라은 단연 내 취향에 가장 잘 맞았다. 가벼운 에세이가 아니라 논문의 출처까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묵직한 전문 서적임에도, 특유의 유머와 말투가 행간에 그대로 묻어난다. 한편으로는 과거 강연에서 얻은 그 유쾌한 이미지가 오히려 이 글이 가진 학문적 무게를 상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쉽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카라이 품고 있는 통찰은 날카롭다. 그는 인간이 웃음이 터지는 순간, 즉 의식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정서적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대상에게 시선을 보낸다고 말한다. 내가 무장 해제되는 그 찰나의 순간,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향하는 곳. 그 시선은 '너와 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라는 무언의 구애 신호이자 연대의 확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바카라에 아주 좋은 문장이라고 표기한 부분은 여기다.
"태도와 가치를 공유하는 인간 문명은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문명을 구성하는 도덕, 규범, 신뢰, 제도 등의 객관적 가치는 하늘에서 떡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평가하는 엄마의 정서적 태도가 문명의 기초가 된다. ..즉, 문명은 타인의 정서와 평가를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아주 사소한 능력이 세대를 건너 축적된 결과다. 아이가 엄마의 정서적 반응을 참조하는 것을 '슬롯적 참조(social referencing)'이라고 한다."
나는 '시선'과 '엄마'에서 뿌리가 자극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여기서 엄마는 꼭 생물학적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 주양육자 혹은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정서를 교류한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누군가'로 확장해도 좋을 것이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가 그린 <아이의 목욕>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 '슬롯적 참조'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림 속 엄마와 아이의 시선은 좁은 대야의 물을 향해 나란히 떨어지고 있다. 아이는 무방비한 상태로 등 뒤의 온기에 기대어,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엄마의 다정하고 단단한 시선을 고스란히 '참조'한다. 타인의 고유함을 온전히 긍정하는 이 고요한 눈맞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시선의 얽힘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세상을 향한 신뢰라는 문명을 배운다.
이것은 어제 우리가 짚어본 '딜렉티오(Dilectio, 지성적 사랑)'의 어원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라틴어 '딜리게레(Diligere)'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대상을 따로 떼어내어 식별하는 행위를 뜻한다. 무언가를 타자와 분리해 정확히 식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즉, 타인을 향한 지성적 사랑(딜렉티오)의 출발점 역시 '시선'이다.
내가 처음으로 가수 '성시경'을 온전히 인정한 순간은 <이윽고(너의 모든 순간)>의 작사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였다. 그 곡은 참 착하다. 아픈 손가락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많이 듣는 노래라고도 한다.(우리엄마 얘기다...) "물끄러미 너를 들여다보곤 해 /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리고 이어지는 묵직한 고백. "너를 보는 게 나에게는 사랑이니까"
이처럼 유행가 가사 중에는 "본다"의 처연한 고백이 자주 등장한다.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고 싶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멀리서나마 상대를 내 시야 안에 담으려는 안간힘이다. 언뜻 무기력해 보이는 그 행위는 사실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절절하고 묵직한 마음의 증명이다.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자 당신의 고유함을 내 세계 안에서 계속 식별해 내겠다는 처절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선'은 어떻게 마음을 담는 잣대가 되었을까? 이토록 무기력해 보이는 '바라봄'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소통 방식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입 밖으로 내뱉는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도구인지를 우리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종종 타인과 완벽하게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간의 소통이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각자가 전혀 다른 경험과 상처의 궤적을 뚫고 살아온, 서로 다르게 진동하는 고립된 우주들이다. 내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과 뉘앙스를 '언어'라는 납작한 도구에 욱여넣어 상대에게 던질 때, 그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언어는 한계가 명확하고, 우리는 모두 타인의 말을 자신의 필터로 굴절시켜 듣는다. 오해와 소통의 단절은 결함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미지의 우주와 부딪힐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마찰열이다.
그렇기에, 마치 뇌를 공유한 듯 서로의 정서적 주파수가 완벽하게 맞닿는 기적 같은 소통의 희소함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우리는 한 번 만난 그 어려운 인연을 쉽사리 놓지 못하고 어떻게든 지켜내려 애쓰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소통이 불완전하고 본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 단절된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해답이 바로 '판단을 유보하고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봐 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당장 이해되지 않더라도, 내 얄팍한 잣대로 상대를 섣불리 재단하거나 등 돌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당장 너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를 내 시야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계속 곁에 두겠다"는 의지. 이 고요하고 지속적인 시선의 헌신이야말로 불완전한 소통을 뛰어넘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인 딜렉티오다.
바라본다는 것은 곧 나의 유한한 '시간(시간=사랑)'과 '주의력'을 기꺼이 상대에게 내어준다는 뜻이다. 수많은 자극이 부유하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오직 당신이라는 존재를 렌즈의 초점 맞추듯 또렷하게 식별해 내는 일. 이 사랑의 시선이 서로 교차할 때, 비로소 소통의 빈틈을 메우는 문명의 기적(슬롯적 참조)이 일어난다. 내가 너를 판단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네가 웃음 터지는 무방비한 찰나에 나를 바라보며 나의 정서를 참조할 때, 우리는 오해의 강물을 건너 서로를 연결하는 튼튼한 다리를 놓게 된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다. 너를 이해해서 사랑한게 아니라, 널 사랑하니까 이해한거니까...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시선을 남겨두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슬롯적 참조'가 문명을 구축하는 뼈대라면, 지금 우리 슬롯가 이토록 혼란하고 야만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부조리한 시스템으로부터 '나쁜 슬롯적 참조'를 비판 없이 계승해 왔기 때문일것이다. 타인의 고유함을 존중하는 바라봄(Diligere) 대신, 권력자의 안색을 살피는 비굴한 눈치를 참조하며 살았다. 카키스토크라시(무능한 자들의 지배)라는 온라인 게임의 괴물들 역시, 이 나쁜 참조가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된 비극적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굴레 속에서 어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망가진 세상과 시스템만을 탓하는 것은 쉽고 무바카라임하다. 진짜 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건강하고 올바른 '모범'이자 단단한 '참조점'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는 10살짜리 내 조카가 자라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아이가 마주할 세상이 지금처럼 삭막하고 비인간적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를 위한 결론은 하나다. 부조리에 휩쓸리지 않고,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는 딜렉티오의 시선을 나부터 잃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은 결국 어른의 등과 시선을 참조하며 자라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이란 거대한 건축물이나 복잡한 제도가 아니다. 완벽하게 소통하지 못해도 "너를 보는 게 나에게는 사랑"이라고 고백하며 묵묵히 시선을 거두지 않는 마음들의 합이다. 세상이 팍팍하고 타인과의 소통이 절벽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우리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정답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곁을 향해 조용히 던지는 시선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그 묵직한 시선조차도, 다음 세대에게는 자신이 이 캄캄한 우주에 홀로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는 강력한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될 것이다.
<'시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명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