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us Solum_Achive
어릴 때 어떤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대사를 들었던 적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이해를 제대로 못한채 문장만 남아있었다.
세상엔 네 가지 가지 종류의 남편이 있는데,
"돈도주고 사랑도 주는 남편,
돈만주고 사랑은 안주는 남편,
돈은 안주고 사랑만 주는 남편,
돈도 사랑도 둘다 안주는 남편이다." 근데 나는 이 넷중에 뭐다 뭐 이런 전개였던것 같다.
그 드라마의 출연진이나 구체적 맥락 뭐 자세한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데, 이 대사는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있는것을 보면 강렬했던것은 분명하다. 사실 너무 충격이었다. 이런 내용의 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도 부자연스럽게 당당했고, 듣는 사람도 화가 누그러지듯 숙연해지는 것을 보고 어린마음에 '뭔가 일리있는 말이었나보다' 생각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랑이라는게 돈과 등가로 매겨질 수 있나보다. 돈을 주면 사랑없이 결혼 생활하는 부부가 실재로 있을 수 있는건가보다 생각했다.
자본주의 슬롯에서 인간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잣대는 "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명제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나를 위해 지불한 재화의 크기로 사랑의 깊이를 판단하려 든다. 저 대사를 처음 들었을때만해도 정말 갸우뚱 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저 명제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훨씬 더 풍요로워진 현대 슬롯에서 이토록 수많은 슬롯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40번 글에서 우리 슬롯문제의 대부분이 '부동산(공간)'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짙은 실존적 불안과 기이한 정신적 괴리감, 즉 '정신분열'에 가까운 우울과 소외의 근저에는 바로 '시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야릇한 괴리감의 가장 깊은 원인은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향해 있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관계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태도에 있다. 상대가 나를 피상적으로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라며 타협하고 넘어가 주는 '상처의 역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상태. 사랑과 헌신이 빠져나간 자리를 편의와 돈으로 메워놓고도 이를 당연시하는 슬롯적 분위기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메마르게 하는 주범이다.
가령,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쓴 '손편지'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조소하는 현상은 인류가 본질적으로 미쳐가고 있다는 징조다. 손편지는 단순히 잉크가 묻은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오롯이 상대를 떠올리며 자신의 물리적 시간을 멈춰 세우고, 내 존재의 일부를 활자로 깎아낸 가장 원초적인 헌신이다. 이것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곧 타인이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과 '실존'을 비웃는 것과 같다.
돈은 '가변적 자원'이지만, 인간에게 허락된 진정한 절대 자원은 오직 '시간'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마음의 척도는 지갑의 두께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이 있으면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좋기 때문에, 당연히 여유롭게 사랑하는 대상과 시간을 나눌 수 있다. 다만 돈이 충분해도 서로에게 시간을 나누고 싶지 않은 경우에는 답이 없다. 서로의 경제적 상황을 누구보다 투명하게 알고 있는 가족의 경우엔 그 내밀한 시간의 분배가 더 불편하게 다가오고, 상대의 피상성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씁쓸한 순간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넘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고대 철학과 현대 경제학, 그리고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지성들은 "사랑은 결국 누군가에게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일"임을 치밀하게 증명해 왔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그의 저서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De Brevitate Vitae)>에서 인간의 모순적인 소유욕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영토를 누가 조금만 침범해도 격렬하게 분노하면서, 정작 가장 귀중한 자산인 '시간'을 타인에게 빼앗기는 것에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것이다. 세네카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가 진정으로 인색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시간이다. 돈은 쓰더라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유한하며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소멸성 자원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나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나의 생명, 즉 존재의 한 조각을 영구적으로 떼어주는 숭고한 행위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놀랍게도 현대 경제학의 냉철한 논리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199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Gary Becker, 1930-2014)는 1965년 <시간 배분 이론(A Theory of the Allocation of Time)> 논문을 통해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제약 조건은 소득(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비싼 선물을 사고 훌륭한 만찬을 준비하더라도, 그것을 함께 누릴 '시간'을 결합하지 않으면 진정한 가치는 창출되지 않는다. 경제학은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파악하는 드러난 선호(Revealed Preference)를 중시한다. 베커의 논리에 빌리자면,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그 시간에 돈을 벌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기꺼이 포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어떤 물질적 투자보다 강력하게 입증된 '진심'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시간의 관계를 가장 심연까지 파고든 것은 마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Dasein, 다자인)의 본질 그 자체가 곧 '시간'이라고 규정하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 방식을 '마음씀(Sorge)'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늘 신경 쓰고, 안위를 걱정하며, 온통 마음이 쓰이는 경험을 한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이 '마음씀'은 곧 나의 시간이 온전히 상대방을 향해 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각자의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문득 상대의 얼굴이 떠오르고, 밥은 먹었는지 걱정하는 그 모든 순간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을지언정, 나의 인지와 사유가 상대를 향해 있는 동안 나의 '시간'은 오롯이 상대의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마음이 쓰인다는 것, 그것은 내 존재의 시간을 온전히 그 사람의 영토 위에 정박시켜 두는 일이다. 마음씀이 곧 사랑의 본질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이란 물리적 동석을 넘어 나의 내면적 시간을 상대방에게 끝없이 쏟아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진 돈의 일부를 주는 것은 나의 '소유물' 중 일부를 덜어주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쓴다는 것은 나의 '존재' 그 자체를 건네는 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상대방이 값비싼 재화를 건넬 때가 아니라, 바쁘고 피곤한 일상 속에서도 기꺼이 나를 위해 자신의 한정된 시간을 할애할 때다. 늘 마음이 쓰여 나의 시간을 기꺼이 당신에게 베어내어 주는 것. 그것은 경제학적으로는 가장 비합리적인 기회비용의 지불이지만, 철학적으로는 한 인간이 타인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거룩한 사랑의 증명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효(孝)도, 사랑도 결국은 함께한 시간에 좌우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의 중점은 단순한 물리적 '길이'보다도 서로의 내면을 조율했던 '밀도'에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 내가 신체적으로 무력하고 정신적으로 가장 취약할때,
즉 실존적으로 누군가를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때
내 곁에 머물며 시간을 내어준 사람은 영혼에 각인이 된다.
나의 미세한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으로 기꺼이 응답해 준 그 밀도 높은 시간은,
불완전한 나를 세상과 연결된 '의미 있는 주체'로 살려낸 구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번 이토록 깊게 각인된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소홀해질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내가 온전히 사랑 받았는지.
사랑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상대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만국 공통으로 합의하는 숭고한 희소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널 이해해서 사랑한게 아니야
널 사랑하니까 이해한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