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us Solum_Archive
결혼한 사람은 모두 '굳이...?' 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그냥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결혼에 대해 언급하거나, 일말의 기대를 가지는 사람은 오직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뿐이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수없이 속으로 되뇌는 문장이 있다.
"잘못 골랐다."
연애 시절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치명적인 매력과 영혼의 교감은,
생활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처참하게 마모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애초에 왜 하필 이 사람을 선택했던 것일까?
<아래 링크 참조>
로맨틱코미디에서는 우리가 운명적인 짝을 알아본 것이라고 속삭이지만,
심리학이 밝혀낸 무의식의 작동 방식은 훨씬 더 맹목적이고 기괴하다.
트라우마 전문가 가보 마테(Gabor Maté,1944- ) 박사님은
그의 저서 <정상이라는 신화(The Myth of Normal),2022>와 수많은 강연을 통해
아주 도발적인 명제를 던진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는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사람을 찾지만,
무의식 밑바닥에서는 내 어린 시절의 모든 불행을 자극할 사람,
즉 '내 부모의 결함(Dysfunction)'을 정확히 빼닮은 사람을 기어코 찾아내어 결혼한다."
과거에 받지 못했던 사랑을, 과거와 똑같은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끝끝내 얻어내어
보상받으려는 무의식적 복수전이자 강박이라는 것이다.
존경하는 CGJ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1875-1961) 옹께서는
기념비적인 논문인
<심리학적 관계로서의 결혼(Die Ehe als psychologische Beziehung),1925>에서
이 기이한 선택을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타인의 진짜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부모의 심상(Imago)이나 억압된 자아를 찰흙처럼 빚어,
눈앞의 파트너 얼굴 위에 영화 스크린처럼 쏘아 올린다.
즉,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파트너의 실체가 아니라 내가 덧씌운 환상이었던 것이다.
결혼 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이 투사의 장막이 찢어지는 순간이 온다.
환상이 벗겨진 자리에 남은 파트너의 적나라한 결함과 마주하며 우리는 지독한 환멸을 겪는다.
"잘못 골랐다"는 뒤늦은 자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처참한 환멸 속에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고 꾸역꾸역 함께 살아가는가?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토록 찬양받는 '위대한 사랑'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교감'이 아니다.
그것은 싫어도 함께하는 것,
그 익숙함에서 오는 '환멸이 가진 압도적인 위력'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융합을 사랑의 최고 가치로 숭배하도록 세뇌당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 보자.
그 고상한 사랑이라는 것은 사실 삶의 무게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무의미하다.
아무리 영혼이 통하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있다해도
현실을 돌파할 용기가 없거나,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랑은 허망하게 붕괴한다.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기꺼이 삶을 버텨낼 용기가 없는 사랑은,
결국 바카라임지기를 회피하는 자들의 무력한 변명일뿐이다.
오히려 환멸 이후의 결혼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는
에로스적인 열망이나 아가페적인 공감이 아니다.
그것은 '적당한 거리, 적당한 관심, 적당한 친절'이다.
언뜻 들으면 이 단어들은 다소 건조하고 계산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1900-1980)교수님께서는
<사랑의 예술(The Art of Loving),1956>에서 관계의 본질을 관통하는 위대한 선언을 남기셨다.
"Love is the child of freedom, never that of domination
(사랑은 자유의 자식이지, 결코 통제(지배)의 자식이 아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프롬 교수님 목소리로 들었는데, 충격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인것 같지만..
내가 하는 사랑이 통제적 사랑이라는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것이다.
우리는 흔히 상대를 내 곁에 강박적으로 묶어두고 통제하려는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결핍과 불안이 만들어낸 소유욕이자 지배욕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불안을 채우기 위해 상대의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나와 분리된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고 그에게 온전한 '자유'를 허락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융 옹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는 상대에게 뒤집어씌웠던 환상을 거두어들이고
비로소 타인을 내 결핍의 대체재가 아닌 '독립된 타자'로 인정하는 성숙의 과정이다.
무리한 감정적 착취를 멈추고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적당한 친절)를 지키며,
각자의 숨 쉴 공간(적당한 거리)을 허락하는 것.
이 단호한 자유를 상호 간에 보장할 때, 관계는 비로소 집착이라는 질식의 늪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 '아이'라는 존재가 태어나 부모로서의 확고한 지위와 법적, 슬롯적 '권리'가 주어지면,
이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덕스러운 감정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철갑을 휘두르게된다.
감정은 흩어지기 쉽지만,
자녀를 매개로 형성된 공동의 바카라임감, 경제적 결합,
그리고 슬롯적 권리와 의무는 날마다 우리의 살갗에 닿는 묵직한 실체다.
이 견고한 삶과 제도의 결속 앞에서는
외부의 어떤 공격도 가정을 깰 만큼의 무게를 갖지 못하는 얄팍한 환상에 불과해진다.
우리는 흔히 '정으로 산다'는 말로 이 상태를 폄하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일구어낸 가장 현실적이고 숭고한 연대인지도 모른다.
내 환상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배우자의 결함을 견뎌내고,
내면의 고독을 씹어 삼키면서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그 평범하고 건조한 일상.
우리는 이를 종종 '불행'이라 착각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감정낭비'의 파랑새를 찾아 떠도는 것보다,
이 무겁고도 질긴 생존의 굴레를 기꺼이 짊어지는 것만큼 강력하고 성숙한 주체적 선택은 없다.
결국 결혼이란 두 영혼이 만나 완벽한 천국을 짓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라는 낯선 세계를 기꺼이 껴안고,
환상이 깨진 그 건조한 자리에서 '적당한 친절과 바카라임감'이라는
진짜 온기를 나누며 함께 늙어가는 진실한 생존의 방식이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된다.
결국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이 되어주는 사람
약속하지 않고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똥바가지를 같이 뒤집어쓰고도 묵묵히 내 옆을 견뎌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내 짝꿍인 것이다.
아무리 밉고 지독한 환멸이 찾아와도
끝끝내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버티는 그 사람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운명의 짝꿍(The O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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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 박사님, 결혼 관련 언급하신 짧은 편집본>
https://youtu.be/8miNxkQilYs?si=0OoUXKamkABfp5Jp
<We need to Talk, 원본 대담>
https://youtu.be/u62afqJ7PEk?si=QaOIHg4JuCsUFf_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