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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Bye, Mr. Grey
예측불가능한 '타자성'에 대한 공포
고백하자면, 나는 어린 시절 미디어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자랐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는 서사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그것이 당연한 '사랑의 문법'이라 믿었다. 하지만 스무 살까지 한국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연인 관계와 사랑의 모습들이, 유럽에서 10년 넘게 이방인으로 살며 마주한 현실 앞에서는 얼마나 비현실적인 환상이었는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마도 한국의 로맨틱한 판타지와 유럽의 건조한 현실, 그 경계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13번(낯선 행복< 익숙한 불행)과 15번(환멸을 이겨낸 유일함)에서 사랑을 살펴본적이 있다. 무의식적인 퇴행과 익숙한 불행, 그리고 환멸을 견뎌내는 현실적인 사랑의 민낯을 살펴본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은 지난해 나의 내면을 강렬하게 타격했던 가장 참신하고도 묵직한 화두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바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혼 변호사 제임스 섹스턴(James Sexton)이 제기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의 환상과 본연의 진정성'에 관한 통찰이다.
그의 주장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로맨틱 코미디는 여자들을 위한 포르노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극단적인 비약이 아닌가 의아했지만, 이내 직관적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두 매체는 본질적으로 놀라울 만큼 동일한 심리적 기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복잡한 감정 교류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철저히 배제한 채, 고도로 양식화(stylized)된 비현실적 환상을 주입한다는 점에서 두 매체는 완벽한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로맨틱 코미디가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비현실적인 서사들이 실제 인간관계에 얼마나 깊은 해악을 미치는지 직시해야 한다.
ㅇ"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착각: 사랑에 빠지면 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나 치명적인 결함마저 완전히 고쳐질 수 있다는 위험한 맹신을 심어준다.
ㅇ 백마 탄 구원자: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통제적이고 사이코패스적인 백만장자가 평범한 여성을 만나 갑자기 다정하고 취약한 인간으로 돌변한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현실에서 '나의 사랑으로 저 파괴적인 파트너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오만이자 망상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환상은 필연적으로 현실의 우리에게 벅찬 '연기(Performance)'를 강요한다. 남성들은 로맨틱 코미디 속 무결점의 주인공을 흉내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여성들은 파트너를 위해 포르노 배우처럼 행동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천 쌍 커플의 밑바닥을 지켜본 이혼 변호사는 날카롭게 묻는다. "그 가면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는가?"
허구를 연기하는 것은 지속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만든 완벽한 허울을 벗어던져야 한다. 편안한 거짓말(Comfortable lie) 속에 숨는 대신, 기꺼이 거절당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불편한 진실(Uncomfortable truth)로서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역설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남성들의 포르노 소비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여성들이 당연하게 기대해 온 로맨틱 코미디 속 완벽한 남성에 대한 환상이 상대에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잣대였을지 처음으로 자각했기 때문이다. 포르노가 여성을 '육체적 도구'로 파편화하여 성적 대상화를 자행한다면,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을 '정서적 결핍을 채워주는 도구'로 대상화한다. 로맨틱 코미디 속 남성은 오직 여성의 불안정한 감정을 무한히 인내하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어내며, 완벽한 해결바카라을 들고 나타나는 '구원자'로 소비될 뿐이다. 이는 결점 많고 나약한 실존적 인간을 이상화된 '감정 자판기'로 전락시키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즉, "로맨틱 코미디는 여자들을 위한 포르노다"라는 발언은, 우리가 대중매체가 만든 '편안하지만 거짓된 환상'에서 벗어나,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불편하지만 진실된 나 자신'으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통찰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기만적인 매체에 매혹되는가? 그 심연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서글픈 방어기제가 도사리고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선언을 통해, 타인의 시선 속에서 객체로 전락하는 존재론적 두려움을 갈파했다. 더 나아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하거나 장악할 수 없는 타인의 고유한 특성을 '타자성(Alterity)'이라 명명했다. 사실 나와 완전히 다른 독립된 우주인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 세계의 균열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100% 알 수 없으며, 이 절대적인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를 유발한다.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통제 불가능하며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렵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이 <액체사랑(Liquid Love), 2003>에서 예리하게 지적했듯, 현대인들은 타인과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상처받고 얽매이는 것은 극도로 회피한다. 언제든 쉽게 끊어낼 수 있는 유동적인(Liquid) 관계를 선호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모순된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는 도피처가 바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1981>에서 갈파한 가상의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다. 보드리야르는 기호와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는 현상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우화를 빌려 설명한다. 제국의 영토와 크기가 똑같은 거대한 지도가 있었는데, 훗날 제국(현실)이 멸망하고 먼지로 사라진 뒤에도 정교한 지도(시뮬라크르)의 조각들만이 남아 오히려 현실을 대체해 버렸다는 이야기다.
보드리야르는 선언한다.
"이제 영토가 지도를 선행하지 않는다. 이제는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며... 지도가 영토를 낳는다
(C'est désormais la carte qui précède le territoire... c'est elle qui engendre le territoire)."
이 통찰은 오늘날 우리의 관계 맺기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미스터 그레이'라는 완벽한 판타지(지도)가, 복잡하고 결함투성이인 현실의 인간관계(영토)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이다. 대중은 시뮬라크르에 중독되어 현실의 파트너에게 미디어 속 허구의 잣대를 들이대며, 덜컥거리고 불편한 진짜 사랑을 '가짜' 혹은 '실패작'으로 치부해 버리는 비극을 낳는다. 철학자 한병철(13번 글 참조)의 '타자의 소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완성된다. 진정한 사랑(Eros)은 내 세계를 산산조각 내고 침입해 들어오는 낯선 타자를 수용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한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상대를 내 입맛에 맞게 개조하려 하거나, 애초에 지도의 복사본 같은 대상만을 찾으려 한다. 미디어 속 무한히 헌신하는 파트너는 진정한 의미의 '타자'가 아니라, 단지 내 욕망이 투영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통제된 환상에서 벗어나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15번 글 참조)은 성숙한 사랑이란 "상대방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나르시시즘적 환상을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며, 아무런 보장 없이 타인에게 나를 온전히 내던지는 행위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한다"라는 말에는, "예측할 수 없는 당신의 결점과 관계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감내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담대한 각오까지 담겨있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미디어가 제공하는 달콤하고 무해한, 그러나 거짓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편안한 거짓말을 버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의 불편한 진실을 껴안아야만 한다.
진정한 연결은 통제를 포기한 그 두려운 벼랑 끝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환상 속의 온실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상처받을 각오로 진짜 사랑의 토양에 발을 디디겠는가?
<이혼변호사 James Sexton 대담>
https://www.youtube.com/watch?v=qv133a1aVu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