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한 장만큼의 급박함

컬렉터의 외도 — 1920년대 《라 비 파리지엔》의 한 페이지

신문 한 장만큼의 급박함. 컬렉터의 외도

1920년대 《라 비 파리지엔》의 한 페이지


오늘 컬렉터의 외도에서 꺼내 볼 것은 잡지 한 장이다.

나는 오래된 서양의 신문과 잡지 가운데 한국이 등장하는 자료를 모은다. 주로 1910년 이전의 것들이고, 일제강점기에 나온 것도 함께 모은다. 다만 이 시기의 자료는 드물다.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서양의 지면에 '코리아'라는 이름이 오를 일이 많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한국은 다시 서양의 신문과 잡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은 자료들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나라, 헤아려 보면 일고여덟 나라에서 발행된 것들이다.


30년 전쯤에는 인터넷이라는 게 지금 같지 않았다. 자료를 모으려면 헌바카라방과 골동품 가게를 하나하나 직접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 관련 자료는 워낙 귀해서 한 번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한참을 뒤지고도 빈손으로 나오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보면 눈치가 보였다. 몇 시간씩 가게를 뒤집어 놓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서는 손님이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가끔은 한국과 아무 상관 없는 잡지를 몇 권씩 집어 들고 나왔다. 오늘 소개하는 이 한 장도 아마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덕분에 그런 수고도, 그런 눈치도 필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립다.

젊은 날 드나들던 가게의 주인들 가운데 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가업을 이을 사람이 없어 아예 문을 닫은 가게도 있고, 아들이 물려받아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가게도 있다. 같은 골목,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도 주인이 바뀐 가게는 처음 가 보는 곳처럼 낯설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다시 눈치를 본다.


그 눈치 때문에 사들인 물건이 꽤 된다. 누군가는 이것을 수집가의 '길티 플레저'쯤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내게는 조금 다르다. 관계를 이어 가기 위해 건네는 커피 한 잔, 함께 나누자고 청하는 밥 한 끼에 가깝다. 그렇게 주인과 관계가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가게 쪽에서 먼저 나를 챙긴다. "이거, 당신이 찾던 거 아니오?" 하며 구석에 따로 모아 두었던 것을 꺼내 주는 식이다.


이제는 그렇게 먼저 챙겨 줄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새로 관계를 맺는 일이 번거로워 자연스럽게 인터넷으로 손이 가는데, 정작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이제 많지 않다. 편해진 대신 만날 수 있는 것이 줄어든 셈이다.



다시 이 잡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그림은 1920년대 프랑스 주간지 《라 비 파리지엔(La Vie Parisienne)》에 실린 삽화로, 삽화가 조제프 큔 레니에(Joseph Kuhn-Regnier)의 작품이다. 당시 파리의 낭만과 위트를 담아낸 이 잡지의 삽화들은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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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신문을 활짝 펼쳐 얼굴을 가렸고, 그 뒤에서 몰래 입을 맞추고 있다. 남자는 페도라를 쓰고 회색 톤의 테일러드 수트를 입었다. 여자는 머리에 꼭 맞는 무늬 클로슈 모자에 에메랄드빛 코트를 걸쳤고, 코트 자락 사이로 레이스 속치마와 스타킹, 우아한 힐이 살짝 드러난다. 전형적인 1920년대 파리, 플래퍼 시대의 차림이다. 수채화처럼 번지는 차분한 파스텔 톤이 아르데코 특유의 분위기를 더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내 눈을 붙잡는 것은 신문이다. 신문에는 당시 파리의 유명 일간지 《르 주르날(LE JOURNAL)》의 제호가 찍혀 있는데, 보는 사람 쪽에서 그 글자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 누구도 그 신문을 읽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 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남녀에게는 신문 한 장으로라도 세상을 가려야 할 만큼의 급박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래 함께한 연인에게서 나오는 몸짓은 아니다. 막 시작된 사이, 서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기에만 가능한 무모함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신문으로 사람들의 시선은 막았을지 몰라도, 이 작은 목격자까지 막지는 못했다.


요즘은 이 그림이 포스터나 캔버스 프린트로 만들어져 판매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거실이나 카페 벽에 걸린 이 두 사람을 마주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장면이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도 닿는다는 뜻일 테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복제된 포스터가 아니라 원본이다. 1920년대 파리의 인쇄소에서 찍혀 나와,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읽히고, 넘겨지고, 세월을 따라 흘러 다니다가 어느 헌바카라방 구석에서 나를 만난 바로 그 종이다. 가장자리의 바랜 빛깔과 종이의 결, 인쇄의 미세한 번짐까지, 그 안에는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같은 그림이라도 복제품은 이미지를 전해 줄 뿐이지만, 원본은 그 이미지가 지나온 시간까지 함께 품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아무 관련이 없어 눈치 때문에 집어 들었던 이 한 장이 지금은 내 수집품 가운데서도 가끔 생각나는 물건이 되었다.

어쩌면 그림 속 두 사람은 훗날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런저런 일을 겪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각자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뒷이야기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는 그림 속 그 순간의 열정이 부럽고, 그 젊음이 부럽다.

30년 전 어느 헌바카라방에서 이 잡지를 샀을 때, 나도 아마 이들과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한국의 흔적을 찾아 가게를 헤매고 있었고, 빈손으로 나서기가 멋쩍어 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 시절 나를 기다려 주던 주인들은 대부분 떠났고, 나는 이제 그림 속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 나이가 되었다.

포스터는 얼마든지 다시 찍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가게, 그 주인, 그 시절의 나는 다시 찍어 낼 수 없다. 눈치 때문에 산 잡지 한 장이 이렇게 오래 곁에 남아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줄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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