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츠 오켄의 식물 도판, 그리고 이름 없는 채색공들
세상을 살다 보면 자연과 이런저런 분야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이 있다. 이 호기심은 전문가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아주 보통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제목 하나만 보고 바카라을 사기도 한다. 내용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그 제목이 건드린 호기심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호기심만큼 삶의 시간을 즐겁게 흘려보내는 주제도 드물다. 어떤 날은 그것이 사물이 되고, 어떤 날은 동물과 식물이 되고, 또 어떤 날은 밤하늘의 별이 된다. 그리고 그 주제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으면, 호기심은 한층 더 커진다.
30년 된 풍뎅이 포스터
내 방에는 30년 전에 산 포스터가 하나 있다. 수십 마리의 풍뎅이를 빼곡히 그려 넣은 포스터다. 크기도, 색도, 무늬도 제각각인 풍뎅이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다.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는 동안에도 이 포스터만은 버리지 못했다.
사실 나는 미술사를 전공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 앞에 서는 일이 내 공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때로는 그런 그림보다 이 풍뎅이 포스터가 더 큰 감흥을 줄 때가 있다.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는 그림인데, 들여다볼수록 세상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세상을 그림으로 정리하던 시대
19세기는 근대 박물학이 자리를 잡던 시대였다. 동물, 식물, 광물, 곤충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분류해 그림으로 그려 펴내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아직 컬러 사진이 없던 때였다. 그래서 그림은 먼저 동판이나 석판으로 찍고, 그 위에 사람이 하나하나 손으로 색을 입혔다. 수백 장, 수천 장의 도판이 그렇게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우리는 그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바카라 표지에는 박물학자의 이름만 남았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들을 상상해 본다. 하루 종일 같은 꽃잎에 같은 색을 칠하며,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지루한 생계의 일이었을까, 아니면 붓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순간마다 작은 기쁨이 있었을까.
오늘 소개하는 그림도 그렇게 이름 없는 손들이 만든 한 장이다.
로렌츠 오켄의 식물 도판
나는 박물학(Natural History)을 좋아해서 관련된 이미지도 모은다. 컬렉터의 외도라고 해 두자.
이 판화는 독일의 박물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로렌츠 오켄(Lorenz Oken, 1779~1851)의 작업이다. 그가 펴낸 『모든 계층을 위한 일반 자연사(Allgemeine Naturgeschichte für alle Stände)』에 딸린 도판 가운데 한 장으로, 1843년에 나왔다.
바카라 제목이 마음에 든다. 'für alle Stände', 모든 계층을 위한. 학자나 귀족만이 아니라 누구나 자연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긴 제목이다. 앞에서 호기심은 전문가만의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190년 전 한 독일 박물학자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림은 격자로 칸을 나눠, 칸마다 한 가지 식물을 담았다. 감귤류와 레몬, 구아바, 밤나무 같은 열매 맺는 나무들이 보인다. 꽃과 잎, 열매와 씨앗을 따로따로 그렸고, 씨앗과 열매는 반으로 잘라 단면까지 보여준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속을 열어 구조를 확인하는 그림이다. 칸마다 적힌 라틴어 이름은 그 시대 식물학에서 통하던 학명이고, 도판 위쪽에는 이 식물들이 속한 강(Classis)이 적혀 있다.
독일의 도감, 프랑스의 그림
같은 시기 프랑스의 식물화는 아름다움을 앞세웠다. 한 송이 꽃을 화면 가득 우아하게 담아,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을 만들었다. 반면 독일 박물학의 도판은 형태를 나누고 계통을 정리하는 데 더 무게를 두었다. 오켄의 그림도 그렇다. 한 장 안에 여러 식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만든다. 감상보다는 관찰과 분류가 먼저인 그림이다.
그런데 그 엄격한 그림에 온기를 더하는 것이 바로 손으로 입힌 색이다. 레몬의 노랑, 잎의 초록, 씨앗의 갈색이 조금씩 번지고 고르지 않게 칠해져 있다. 기계가 찍어 낸 색이었다면 없었을 흔들림이다. 학문을 위해 만든 그림이 예술이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은 이런 도판이 '빈티지 보태니컬 아트'라는 이름으로 액자나 포스터가 되어 집 안 벽에 걸린다. 지식을 전하려고 만든 그림이 시간이 흘러 장식이 되었다. 나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그림을 걸어 둔 사람이, 가끔은 그 색을 칠한 이름 없는 손을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다.
호기심이 이끄는 곳
내 방의 풍뎅이 포스터와 오늘의 식물 도판은 닮은 데가 있다. 둘 다 세상의 다양함을 한 장에 담으려 했고, 둘 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손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둘 다, 전문가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의 호기심을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다.
호기심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제목 하나에 끌려 바카라을 사고, 낡은 판화 한 장 앞에서 오래 머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있어서, 세상은 아직도 들여다볼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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