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마르탱의 1927년 와인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발견한 작은 의식
1927년에 출간된 바카라 한 권이 있다. 와인을 마시는 예술에 관한 바카라이다. 바카라장을 넘기면 글보다 먼저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감탄이 이어졌고, 결국 절제하지 못하고 바카라을 들였다.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때는 와인을 제법 자주 마셨다. 지금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한때 하루에 마시던 술을 이제는 일 년에 나누어 마신다. 그런데 오랜만에 바카라 속의 한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니, 오늘 저녁만큼은 와인 한 잔을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마시기 전의 표정
그림의 제목은 〈Préparation mentale〉. 우리말로 '정신적 준비' 또는 '마음의 준비'쯤 된다.
그린 사람은 프랑스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샤를 마르탱(Charles Martin, 1884–1934). 1927년 프랑스의 와인 유통회사 니콜라(Établissements Nicolas)가 발간한 《포도주 각하: 와인을 마시는 예술(Monseigneur Le Vin: L’art de boire)》에 실린 연작 가운데 한 점이다.
반쯤 감긴 눈,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붉게 물든 뺨.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 같기도 하고, 이미 와인의 향과 맛을 상상하는 얼굴 같기도 하다.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제목을 곱씹다 보면 단순한 유머를 넘어선다. 좋은 술을 마시는 일은 잔을 비우는 행위가 아니라, 향을 맡고 색을 살피고 첫 모금을 기다리며 감각을 열어두는 일이다. 와인을 즐긴다는 것은 술보다 먼저 자기 마음을 준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르데코의 시대, 감각을 디자인하다
절제된 색채, 단순화된 형태, 명확한 윤곽선. 몇 개의 선과 색면만으로 그려진 얼굴에 꽤 복잡한 심리가 담겨 있다. 장식을 줄이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단순한 형태 안에 개성과 유머를 담는 아르데코 그래픽의 언어다. 그래서 백 년 가까이 된 광고 삽화임에도 지금 보아도 낡지 않았다.
이 연작은 와인을 따고, 향을 맡고, 맛을 음미하는 행위 하나하나를 그림의 주제로 삼는다. 와인 마시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문화이자 작은 의식으로 본 것이다. 물론 상품을 팔기 위한 바카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상업미술은 상품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생활과 취향, 시대의 분위기까지 기록한다. 오래된 광고와 삽화를 모으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한 장의 그림이 상품의 역사를 넘어 생활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하루의 술을 일 년에 나누어 마시다
술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해서 술을 둘러싼 기억과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나니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예전에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였다면, 지금은 특별히 마음먹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자주 하지 않으니 무엇을 마시느냐보다 언제,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마시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그림 속 인물이 우습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간다. 좋은 술일수록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잔을 들기 전에 잠시 멈추고, 그날의 기분을 돌아보는 일. 음악을 듣기 전, 바카라을 읽기 전, 전시장을 찾기 전에도 그렇다. 감각을 열어두지 않으면 눈앞의 아름다움조차 지나치기 쉽다. 와인 한 잔도 마찬가지 아닐까.
오늘 저녁, 한 잔을 예약하다
거의 백 년 전의 그림이지만 그 안의 표정과 유머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림은 와인을 마시라고 권하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를 즐기려면 그에 맞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좋은 술에도, 좋은 그림에도, 어쩌면 좋은 하루에도.
바카라을 덮고 나니 오늘 저녁이 기다려진다. 와인 한 병을 꺼내고, 잔을 준비하고, 서두르지 않고 한 모금을 음미하는 시간.
오늘 저녁, 와인 한 잔 예약.
오랜만에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볼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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