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적이어도 괜찮아

by해서 Madame Proust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무언가를 배우러 갔을 때는 더 그렇다. 기왕 시간과 돈을 들였으면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다.


그래서 바이올린 수업 방식이 조금 낯설었다.

수강생은 스무 명 정도. 한 교실에서 각자 연습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잠깐씩 봐준다.

한참 기다려 내 차례가 와도 레슨은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스즈키 1권의 짧은 곡 하나를 켜면 선생님이 몇 군데를 짚어준다.


“다음 곡도 똑같이 연습하세요.”


그리고 다음 사람에게 간다.


이러다 언제 배우지?


두 번째 수업 날은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왕초보들은 다른 방에서 따로 연습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쪽에서 활 잡는 법부터 음계 스티커 붙이는 것까지 하나하나 봐주고 있었다.


첫날에는 나도 그 방에 잠깐 있었다.

음계도 제대로 못 짚는 나와 또 한 분이 함께 보내져 졸지에 왕초보반 격리 조치를 당했다.


그런데 두 번째 수업에서 그분의 연주를 듣고 놀랐다.

어라, 잘하시는데?

비브라토까지 자연스럽게 넣었다.


나는 스즈키 1권의 곡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려운 곡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켜도 내가 원하는 예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또 한 번.

연습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너무 충분했다.

결국 지겨워져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그때 옆자리 분과 눈이 마주쳤다.


“힘들죠?”


그게 시작이었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석 달 됐다는 그녀는 미국에서 살았던 이야기부터 가족 이야기까지 줄줄이 풀어놓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내게 말했다.

“이제 선생님 이야기도 해봐요.”

나도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이올린은 내려놓은 채 자기소개가 길어졌다.


그때 조금 떨어져 있던 아까 그분이 일부러 우리 쪽으로 왔다.

“연습은 안 하고 수다만 떨어?”

혼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지 않았다.

그대로 수다에 합류했다.

잠시 뒤 첫날부터 영어로 이야기하던 또 한 분까지 들어왔다.

바이올린 네 대가 조용해지고 네 사람의 입이 바빠졌다.


“그런데 바이올린 정말 잘하시던데요?”


알고 보니 그분은 예전에 바이올린을 꽤 오래 했고 교회 앙상블에서도 연주했다고 했다. 10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왕초보 동지인 줄 알았더니 휴면 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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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이야기도 나왔다.

“몇 살로 보여요?”

또 어려운 질문이 나왔다.

다들 퀴즈를 풀듯 숫자를 내놓았다.


정답은 예순일곱.


“어머, 훨씬 젊어 보여요.”


나는 정말 모르겠다.

살아온 시간을 읽는 것과 나이를 맞히는 것은 다른 일인 모양이다.


한참 떠들고 나니 슬슬 눈치가 보였다.


“우리 너무 떠들었나 봐요.”


넷은 다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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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다시 들었다.


그런데 세 시가 넘자 여기저기서 케이스 닫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짐을 챙겨 돌아갔다.


솔직히 나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차마 짐을 싸지 못했다.


오늘 한 게 너무 없는데...


선생님이 돌아오면 한 번이라도 더 봐달라고 하고 싶었다.


한참 뒤 돌아온 선생님은 너무 지쳐 보였다. 교실에는 빈자리도 많았다. 이미 수업은 끝난 분위기였다.


결국 두 번째 레슨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전처럼 지겹지는 않았다.


끝까지 남은 몇 사람이 다시 모였고 제2의 수다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아까 처음 말을 걸었던 분과 그 짝꿍은 수업 한 시간 전에 와서 영어 프리토킹을 한다고 했다.


그제야 첫날의 의문이 풀렸다.


둘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교포인가?

조금 삐딱하게는,

영어 좀 한다고 자랑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한 시간 일찍 와요. 같이 해요.”


영어 프리토킹이라니.

자신은 없었지만 한번 해보기로 했다.


“네. 올게요.”

전화번호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했다.

“저 영어 이름도 있어요. Sharon이에요.”

여기까지만 했으면 됐다.

“줄여서 샤라고 해요.”

여기서도 끝내지 않았다.

“프랑스어로 chat가 고양이라는 뜻이거든요.”

아무도 거기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오버 토크였다.

영어 프리토킹을 하기도 전에 한국말 프리토킹부터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학기 말 연주회 이야기도 들었다.

둘이나 넷이 함께 연주하는데 잘하는 사람은 제1바이올린을 맡는다고 했다.

오호.

제1바이올린.

귀가 번쩍 뜨였다.

아까까지 지겹다고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던 사람이 갑자기 작은 야심을 품었다.

제1바이올린 하려면 연습 좀 해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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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참 비효율적인 수업이었다.


레슨은 5분 남짓이었고, 기다렸던 두 번째 레슨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배운 것은 별로 없는데 가져오는 것은 많았다.


영어 프리토킹을 함께하자는 약속 하나.

새로 저장한 전화번호 몇 개.

왕초보 동지인 줄 알았던 휴면 고수 한 명.

그리고 제1바이올린을 해보고 싶다는 작은 야심까지.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나였다.


예전의 나는 이런 강좌에 가면 철저한 마이웨이형이었다.

캡을 푹 눌러쓰고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내 할 일만 하고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배우는 일과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내게 별개의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도 한다.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영어 프리토킹을 하겠다고 한 시간 일찍 오기로 약속한다.

심지어 아무도 묻지 않은 영어 이름의 유래까지 설명한다.


예전의 나라면 그런 사람을 보며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 말이 참 많네.

그런데 그날의 ‘저 사람’은 나였다.


배우러 가서 배울 것만 챙겨 돌아오던 사람이
요즘은 사람까지 챙겨 돌아온다.


어쩌면 배움에는 이런 비효율도 필요한지 모르겠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것만 배우고 돌아왔다면 나는 그날 바이올린 몇 마디를 더 배웠을 것이다.


대신 사람 몇 명을 놓쳤을 것이다.


좋은 변화인 것 같기는 한데...


잠깐.


이러다가 나 오지라퍼 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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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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