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 바카라을 읽는 사람이 있구나

안녕, 살롱 드 리브르!



도서관에서 다시 만난 《압록강은 흐른다》


2주에 한 번 목요일이면 도서관에서 바카라을 빌린다.


빌린 바카라을 반납하고 다시 다섯 권쯤 빌려온다. 미리 읽을 바카라을 정해 갈 때도 있지만 대개는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그러다 제목 하나에 눈이 멈추면 바카라을 꺼내 몇 장 넘겨본다.


도서관에 가는 즐거움 중 하나다.


이번에는 서가에서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압록강은 흐른다》.



한동안 바카라 등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 바카라을 읽는 사람이 있구나.’


어린 날의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바카라. 감동 깊게 읽었다는 기억만큼은 선명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줄거리는 흩어져 버렸고, 마음을 뒤흔들었던 문장 하나 온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바카라의 내용은 거의 잊었는데, 그 바카라을 품고 좋아했다는 사실의 온도만큼은 잊지 않고 살아있었으니.


며칠 전의 일도 문득 겹쳐졌다. 마당에 피어난 연꽃이 고와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냈더니, 친구가 마침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있는 중이라며 바카라 속에도 연꽃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 잊고 지냈던 오래된 바카라 한 권이 툭,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었다.



나도 다시 한번 펼쳐봐야지. 그리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는데, 거짓말처럼 도서관 서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바카라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 타국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 내려간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다시 읽는 페이지마다 예전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낯선 풍경들이 스며들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해서 굳이 설명조차 필요 없는 일상과 풍습들이, 저자의 담담한 문장 속에서는 한 걸음 물러선 시선으로 그려진다. 어린 시절의 집, 품에 안기던 가족, 사계절의 냄새와 자연…. 마치 아주 먼 별에서 온 사람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향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되살려내듯 애틋하다.


바카라장을 넘기다 문득 ‘노스탤지어’라는 단어의 뼈대를 생각해 본다. 돌아감을 뜻하는 'nostos'와 고통을 뜻하는 'algos'. 돌아가고 싶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아픔.


고향을 떠나 이국의 언어로 아득한 조선의 소년 시절을 불러낸 이미륵에게, 이보다 더 저며오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오래된 바카라을 다시 펼쳐드는 일에도 어쩌면 그런 마음이 깃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예전에 읽었던 바카라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있어도, 그 바카라을 품었던 눈부시던 시절 그 자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므로.


바카라을 읽던 그 시절, 어린 나는 무엇을 보았고 어느 대목에서 숨을 죽였는지 이제는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고요히 《압록강은 흐른다》를 펼쳤을 때,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왜 그토록 이 바카라을 좋아했었는지. 담담하게 가라앉은 문장들 사이로 잊고 지냈던 시간의 온기가 피어올랐다. 낯설 만큼 아득한 이야기인데도 신기하게 마음이 편안해졌고, 조용히 흐르는 호수 같은 속삭임에 자꾸만 다음 장으로 손이 갔다.



나는 어느새, 다정했던 옛 바람이 불어오는 그 페이지 속으로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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