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장은 내가 쓴다

하루 종일 돈이 나를 따라다녔다

by해서 Madame Proust

하루 종일 돈이 나를 따라다녔다.


도서관 영어회화 수업 전날이면 선생님은 문자를 보내신다.


이번 주에는 이런 문장이 왔다.


You can't go wrong with Mary(선생님이름) on Tuesday and Thursday afternoons.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선생님 수업이 진리다.

대충 그런 뜻이다.


다음 날 선생님도 웃으며 말했다.


“제가 써놓고도 좀 오글거리죠?”


아마 선생님은 우리가 You can't go wrong with라는 표현을 잊지 않도록 일부러 문장 속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모양이었다.


수업에서도 여러 예문이 나왔다.


You can't go wrong with black.

검정은 실패하지 않는다.

검정이 진리다.


그리고 또 하나.

You can't go wrong with cash for a gift.

선물할 때는 현금이 진리다.


Cash.


그때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하루 종일 돈이 나를 따라다녔다.


오늘 선생님은 정말 검정을 입고 오셨다.


스터드가 잔뜩 박힌 검정 상의에 반바지, 역시 징이 박힌 하프 부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길이 갔다.


Amazing.


나는 그런 모습이 좋다.

단순히 옷을 잘 입어서가 아니다.

수업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온 사람의 모습 같아서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말뿐 아니라 옷차림에서도 보이는 것 같았다.

수업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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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씩 모여 질문을 만들고 서로 대답하는 액티비티가 있었다.


그러다 이런 질문이 나왔다.


What do you think makes a good parent?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머릿속에서 아는 영어 단어를 얼른 끌어모았다.

support, respect……

아이들을 지지해주고, 선택을 존중해주고,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부모.

뭐, 대충 그런 이야기를 했다.

영어로 말하려니 평소 생각의 절반쯤밖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뜻은 전달되었으리라.


그런데 함께 이야기하던 60대 남자분이 말했다.


“50대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더 나이가 들면 결국 돈이에요.”


돈?


좋은 부모 이야기에서 갑자기 돈이 등장했다.


“아이들 차 사주고 집 사주면 그게 최고예요.”


순간 웃었지만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너무 직설적이잖아, 싶다가도 틀린 말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밥을 해주고, 아프면 돌봐주고,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면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른이 되자 필요한 것의 단위가 슬쩍 커졌다.

차.

집.

결혼.

독립.

이쯤 되면 ‘엄마가 널 믿어’만으로 해결하기에는 금액이 좀 세다.

나도 아이들이 무언가를 원할 때 선뜻 해줄 수 없으면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내가 좀 더 잘 살았어야 했나?


열심히 살았고, 좋은 엄마가 되려고 나름 애썼고, 지금까지는 내가 꽤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통장 앞에서는 자신감이 살짝 작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둘째 아들이 내게 말했다.

“엄마는 돈 안 되는 것만 하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글을 쓴다.

돈 안 된다.

발레를 한다.

돈이 나간다.

바이올린을 한다.

역시 돈이 나간다.

바카라을 읽고 공부를 한다.

이것도 대체로 돈이 나가는 쪽이다.

아들아.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니 엄마도 할 말이 별로 없구나.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발레학원에서도 돈 이야기가 나왔다.

블로그나 유튜브를 해서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부럽다.”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


나도 블로그를 한다.

글도 꽤 많이 쓴다.

그런데 수익은?

계산할 필요도 없다.

0원.


오늘은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돈이 나를 따라다녔다.


영어 예문에서는 선물의 정답으로 등장했고,

좋은 부모의 조건으로 나타났고,

발레학원에서는 성공의 증거가 되었고,

급기야 오래전 아들이 했던 말까지 불러냈다.


Cash.


정말 현금이 진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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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들을 한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은 아들의 자리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영어수업의 그분도 그 나이까지 살아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많이 버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나 역시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돈의 힘을 예전보다 더 자주 실감한다.


돈은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게 하고, 자식이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게 하고, 늙어서 다른 사람에게 덜 의존하며 살아갈 가능성도 높여준다.


그러니 돈을 가볍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질문 하나가 남는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을 오래 좋아해온 시간은 무엇으로 계산해야 할까.


나는 글을 쓰면서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발레를 하면서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내 몸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바이올린은 아직도 마음대로 소리가 나지 않지만 한 곡을 끝까지 연주했을 때의 기분은 꽤 근사하다.

바카라을 읽고 공부하면서 당장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하나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모두 적자인가.


어쩌면 사람은 저마다 다른 계산법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통장에 남은 것을 세고,

누군가는 자신에게 남은 것을 센다.

문제는 가끔 내가 내 계산기를 내려놓고 남의 계산기를 빌려온다는 것이다.


아이의 계산기.

다른 부모의 계산기.

돈을 잘 버는 사람의 계산기.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계산기.


그것으로 내 인생을 두드려본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갑자기 내 인생이 적자가 된다.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초라해지고,

좋아서 해온 일들은 쓸모없는 일이 되고,

아직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은 철없는 욕심처럼 보인다.

계산기가 달라졌을 뿐인데 인생의 값이 달라진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오는데 몇몇 학생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학기는 수업이 너무 어려워.”


난 너무 재미있었는데.


같은 시간,

같은 교실,

같은 선생님,

같은 수업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수업이었고, 나에게는 다음 시간이 기다려지는 수업이었다.


인생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받아가는 것이 다르다.


그러니 그분의 대답이 틀린 것도 아니고 내 대답이 맞는 것도 아니다.


그분에게 좋은 부모의 조건에는 돈이 있고,

나에게는 아직 지지와 존중과 곁에 있어주는 일이 있다.


살다 보면 내 대답도 달라질지 모른다.


나는 그분의 말을 듣고 조금 수긍했고,

조금 씁쓸했고,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오래 생각했다.


돈으로 계산해야 하는 것은 분명히 있다.

차도, 집도, 생활비도, 노후도 그렇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같은 계산기에 올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래 좋아한 것.

뒤늦게 배운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써온 문장들.


그런 것에는 아직 단위가 없다.


어쩌면 나는 그 단위를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남의 대답도 들어보고,

가끔 흔들리고,

때로는 내 대답을 고쳐가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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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