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이번 역은 타인의 삶입니다 24화

#이번 역은 신도림ㅡ같은 동네입니다.

byonharu



며칠 후 ㅡ.

강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신도림역에 내려서 출구를 찾아 나가려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큰 키에 안절부절못하며 두리번거리는 저 사람 혹시,

"저기요 ㅡ"

소희가 다가가서 불렀다.

서준의 두 눈이 번뜩였다.

놀란 건지 반가운 건지 헷갈리는 반응이었다.

"…어… 기다렸어요."

그 짧은 한마디가 공기 중에 툭 떨어졌다.

그 뒤로 찾아온 침묵은 어색하다 못해 팽팽했다.

서준은 뒷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폰을 꽉 쥐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어색함.

하지만 싫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마침내 서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쪽 방향으로 가세요?"

그가 출구 쪽을 가리켰다.

신도림역의 익숙한 출구였다.

소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ㅡ."

"아… 저도요."

그게 다였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차가운 공기가 조금은 훈훈하게 바뀌는 기분이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서로의 어깨가 닿지 않을 만큼 딱 긴장감이 감도는 간격을 유지한 채로.

늦은 밤의 신도림 거리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퇴근한 온라인 게임인들의 웃음소리,

편의점 앞의 밝은 조명,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소한 치킨 냄새까지.

매일 오가던 흔한 동네였는데,

오늘은 모든 풍경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빛나 보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서준이었다.

"혹시 이 동네 사세요?"

"네, 여기 산 지 꽤 됐어요."

"아, 진짜요? 저도요. 바로 근처예요."

소희는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하철 안에서 그가 어디서 내리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이 설레는 느낌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와, 그럼 같은 동네였네요?"

"그러게요. 꽤 가까운 거 같은데 이제야 알았네요."

서준이 낮게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소희의 가슴 한구석을 툭 건드렸다.

소희는 곁눈질로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웃을 때 진짜… 저렇게 다정할 수 있나.'

자꾸만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튀어나왔다.

"근데."

소희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매일 아침 그 시간에 지하철 타요?"

서준이 발걸음을 잠시 멈칫했다.

"… 그냥, 그 시간이 저한테 제일 편해서요."

"아… 그렇구나."

소희는 모른 척, 대답했다.

서준이도 물었다.

”매일 왼편 봉 잡고 서있잖아요..?."

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나를 봤어요?"

"눈에 너무 띄어서요."

서준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앞을 보았다.

그의 귀 끝이 터질 듯이 빨개져 있었다.

소희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눈에 띄었구나. 나ㅡ , '

"학교 다녀요?" 서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 건대 다녀요. 서준 씨는요?"

"저는 — "

순간, 소희의 입에서 급작스럽게 아는 척 말이 툭 튀어나왔다.

"서울대 맞죠ㅡ?"

아차, 소희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서준이 놀란 듯 걸음을 멈추고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 어떻게 알았어요?"

소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시스템이 준 기회로 그곳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그게, 그…."

"네?"

"… 그냥, 내리는 거 본 적 있어서요."

"내리는 거요? "

"지하철 내릴 때… 우연히."

서준은 한동안 소희를 말없이 응시했다..

소희는 에코백 끈을 꽉 움켜쥔 채 뜨거워진 귀를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봤다고 인정해 버렸어, 나 지금. 스토커 같잖아!'

한참의 침묵 끝에 서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보고 있었어요?"

소희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서준이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뜸 들이다가—

"저도요…"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 위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걸으면서 조금씩, 서로의 조각들이 맞춰졌다.

서준이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보는 게 습관이라는 것.

그 말에 소희도 웃으며 화답했다.

"저도요. 저도 사람 구경하는 거 좋아해요."

"진짜요?"

"네, 그래서 늘 봉 잡고 서서 사람들을 보는 거예요."

서준이 소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늘 거기 서 있었구나. 왠지 모르게 계속 눈길이 간다 했더니."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의 어색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몽글몽글한 설렘이 차올랐다.

편의점 앞, 갈림길이었다.

소희의 집 방향과 서준의 집 방향이 여기서 나뉘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을 멈췄다.

"저… 저는 이쪽이에요."

"저는 저쪽이네요."

다시금 어색한 공기가 찾아왔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서준이 머뭇거리다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 — 연락처, 받아도 될까요?"

소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

핸드폰을 건네고, 다시 돌려받았다.

잠시 후, 소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한서준입니다.]

그 짧은 세 글자.

그게 전부였지만, 소희는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그럼, 잘 가요."

"네, 서준 씨도요."

서준이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소희도 제 갈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걸음, 세 걸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희가 먼저 멈춰 섰다.

"저기요!"

서준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소희는 활짝 웃었다.

"잘 들어가요."

서준의 귀가 다시금 새빨갛게 물들었다.

"…네. 소희 씨도요."

그가 처음으로 소희의 이름을 불렀다.

소희는 마음을 감추려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돌아섰다.

집까지 가는 그 길이 붕 들뜬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발을 동동거리며

핸드폰을 켰다.

[한서준입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다가,

소희는 핸드폰을 꼭 쥐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때였다.

[혹시… 이번 주 토요일 어때요?]

이것은… 설마…

소희는 바로 답장을 하고 싶었지만,

꾹 ㅡ 참고는

5분 뒤...

[네 , 좋아요]

스스로 쿨했다고 다독거리며

침대를 뒹굴거리고 있었다.

이게 시스템이 말했던 '타인의 삶'을 마무리하고 얻은 선물일까?

소희는 이번 주를 기분 좋게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