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서울대 ㅡ서울대입구역입니다.
오늘은 좀 달랐다.
소희는 2호선 문 안쪽, 왼편 봉을 잡고 서 있었다.
에어팟, 가방 앞으로,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제는 완벽하게 몸에 밴 지하철 습관이었다.
다만 오늘은 생각을 깊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체험을 겪은 탓인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이나 들으며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맞은편 봉 쪽에서 시선을 살짝 스치던 그 순간, 묘하게 눈에 걸리는 형체가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깔끔한 백팩을 메고, 에어팟을 낀 채 창밖을 보는 한 남자.
캐주얼한 기본 점퍼를 입은 그는 소희와 비슷한 나이의 대학생 정도의 느낌이 있었다.
그냥 서 있는데 시선이 슬쩍 닿았다.
'잘생겼네...'
소희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속으로 피식 웃고는 곧장 시선을 거뒀다.
타인을 관찰하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또 남의 얼굴을 뜯어봤나 싶어 스마트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묵직하게 울렸다.
[체험 티켓이 발급되었습니다.]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소희는 화면을 보다가, 맞은편에 서 있는 그 남자를 보았다.
'설마... 저 사람이야? 안돼...'
소희는 곧바로 [N]을 눌렀다.
하지만 화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야, 싫어... 나 N 눌렀거든?"
소희가 당황해서 다시 [N]을 연타했다.
다다다 다닷 ㅡ!
화면이 살짝 깜빡이더니 기어코 똑같은 문구를 띄웠다.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시스템이 아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소희는 울상이 되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왜 하필... 하아... 알겠어, 알겠다고.’
결국 손가락이 떨리며 [Y]를 찍었다.
눈이 떠졌을 때, 첫 번째로 느낀 건 '심장'이었다.
쿵- 쿵- 쿵-
불규칙하면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소희가 놀라서도 아니고,
이어폰의 노래 때문에도 아니었다,
이 몸 자체가 애초에 두근거림을 장착하고 있었다.
’어? 왜 이래, 심장이 이렇게까지 뛸 수 있어?
커피를 얼마나 마신 거야... 이 사람?’
봉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꽉 들어갔다.
귓가에는 에어팟을 통해 활기차고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들떠 있는 이 느낌,
이 남자, 왜 이렇게 신났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온몸의 세포하나하나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카톡이 울린 건 그때였다.
[친구들 단톡방]
"야, 한서준! 너 또 신도림에서 반대쪽 지하철 타냐 ㅋ?"
"야, 미친놈 왜 굳이 멀리 돌아오냐고...
저번처럼 역 지나치지 말고 정신 차려"
'강의 시간 얼마 안 남았다 튀어와라 ㅡ! ㅋㅋ'
아, 이 남자의 이름이 한서준이구나.
소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이번 역은 서울대입구역이었다.
서준은 문 앞으로 자리를 옮겨 내릴 준비를 했다.
‘엥..? 서울대 생이었 ㅡ “
생각할 틈도 없이 문이 열리자마자 몸이 튀어나갔다.
우다다다ㅡ
소희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주지 않고 발걸음이 캠퍼스를 향해 질주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시각은 수업 시작 정각.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리는 순간, 소희는 숨을 헐떡였다.
"하아... 아까 지하철에서는 그렇게 느긋하게 서있더니 아 숨차...!!!"
가방이 왜 이렇게 무겁나 했더니 노트북, 전공바카라, 두툼한 노트파일,
하나같이 돌덩이 같았다.
이 남자의 하루는 틈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강의실로 이동했고,
점심은 학교식당 구석에서 노트북으로 논문들을 읽으며 샌드위치를 욱여넣었다.
소희가 속으로 외쳤다.
'야, 밥 먹을 때는 좀 쉬어라!'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피곤하고 졸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불꽃이 튀듯 타올랐다.
지쳐 죽겠는데 에너지가 넘치는 이중적인 상태.
이 남자는 대체 뭐가 그렇게 신나서 하루를 시작한 걸까.
오후가 되자 도서관에서 숨도 안 쉬고 리포트를 작성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번뜩 폰을 보더니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로 짐을 챙겨 튀어나왔다.
친구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지하철역으로 전력 질주.
마침 지하철도 딱 도착해서 탑승하고는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안내방송은 신도림 방향이 아니라는데..?
아침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까 분명 친구들 한테도 집에 간다고 했는데'
소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방향 반대로 탔어... 이 사람 완전 길치잖아.'
똑똑한 친구가...
참 당황스럽긴 했지만 내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어차피 한 바퀴 크게 돌면 그만이었다.
몸은 자연스럽게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에어팟을 다시 귀에 꽂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문 앞 봉을 잡고 서있더니,
에어팟으로 듣던 오디오북을 끄고 부드러운 발라드로 바꿔 들었다.
’아직 멀었다고... 신도림... 왜 벌써 서는 거야!
아, 다리 아파...’
문득, 서준의 시선이 열차 안의 특정 지점으로 꽂혔다.
“이번 역은 건대 ㅡ건대입구 역입니다”
맞은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 순간, 서준의 몸 안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밀려오던 피로와 나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귓가의 심장 소리가 머릿속을 하얗게 뒤흔들었다.
쿵, 쿵, 쿵-.
미칠 듯이 빨라진 박동에 숨이 턱 막혔다.
서준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숨을 제대로 쉬면 어깨가 들썩이는 것까지 들킬 것 같아,
봉을 더욱 꽉 잡고 창밖을 보다가
다시 힐끔ㅡ 무언갈 쳐다봤다.
소희는 도저히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서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창가에 비친 실루엣을 훔쳤다.
서준의 눈동자에 담긴 사람 ...
쿵쿵 ㅡ
‘저 사람.. 나잖아..!?’
소희는 순간 생각회로가 정지되고, 소름이 돋아났다.
서준은 화들짝 시선을 거뒀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만 바라봤다.
이유도 모른 채 신경 쓰이던 그 시선의 끝.
종일 쿵쾅거리는 심장.
전부 다,
나 때문이었다...
쿵ㅡ쿵ㅡ쿵ㅡ,
도무지 진정되지가 않았다.
[오늘의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원래의 몸으로 귀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