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퇴근ㅡ마음의 콘서트 중입니다.
퇴근 시간대치고는 약간은 한산한 칸이었다.
소희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는 평소보다 늦게 지하철을 탔다.
오늘도 역시 문 옆에 서서 에어팟을 낀 채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관찰했다.
다들 비슷했다. 핸드폰 보는 사람, 눈 감은 사람, 창밖 보는 사람.
그중 한 명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서른 초반쯤의 남자였다.
이어폰을 끼고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눈도 깜빡이는 것 말고는 거의 안 움직였다.
'저 사람은 오늘 일이 힘들었나 보네 멍 때리는 걸 보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정적이라 오히려 눈에 띄었다.
무슨 노래를 듣는지도 짐작이 안 갔다.
그때 진동이 왔다.
[체험 티켓이 발급되었습니다.]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소희는 그 무표정을 다시 봤다.
[Y].
눈이 떠졌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건 음악소리였다.
ㅡ 쿵, 쿵, 쿵 ㅡ,
큰 소리의 노래가 고막을 때리며 온몸을 울렸다.
소희는 하마터면 입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몸속은 이미 광란의 콘서트장이었다.
ㅡ 끼야아아야악!!! 호우!!!
귓가를 울리는 밴드 사운드에 맞춰
머릿속에서는 수만 명의 환호와 떼창이 폭발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겉이랑 속이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ㅋ?'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몸속에서는 록 페스티벌이 펼쳐지고 있어 이렇게 날뛰고 있는데,
좀 전에 소희가 봤던 이 남자는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아니, 지금 다시 느껴보니 완전히 멈춰 있는 건 아니었다.
신발 끝이 미세하게 까딱거리고 있었다.
완벽한 박자에 맞춰, 남들이 보기엔 신발을 아주 살짝 움직이는 것만 같은 눈에도 잘 안 띄는 움직임.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가락 끝이
톡, 톡, 톡 드럼을 치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무릎에 손을 얹은 점잖은 온라인 게임인이었지만,
소희의 손끝 안에서는 지금 이 사람은 본인이 이 밴드의 드러머였다.
이 남자는 온몸으로 음악을 삼키고 있었다.
그 거대한 흥을 오롯이 혼자만의 내면에서 폭발시키는 중이었다.
후렴구가 터지자 이번에는 어깨가 아주 살짝 들썩였다.
정말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떨림.
하지만 소희는 그 안에서 이 남자가 지금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뛰어놀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와… 이 사람 지금 머릿속으로는 무대 위를 날아다니고 있잖아.'
웃음이 터지려는 걸 입술을 깨물며 겨우 참아냈다.
이 남자의 표정 관리 능력은 거의 특급 요원 수준이었다.
잠시 후, 다른 곡으로 바뀌었다.
이번엔 온몸을 간지럽히는 빠른 비트의 청량한 록음악이었다.
순간, 발끝의 까딱거림에 속도가 붙었다.
소희는 그 리듬에 자신도 모르게 사정없이 들썩였다.
남의 몸인데도 심장이 쿵쿵 뛰며 같이 흥이 올랐다.
'아, 왜 이렇게 신나는 건데..! 이 정도면 코인노래방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 몸은 철저한 절제의 화신이었다.
딱 발끝, 딱 손가락 끝. 그 이상의 일탈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억눌린 에너지가 오히려 더 짜릿하게 다가왔다.
한 정거장이 지났다. 또다시 곡이 바뀌었다.
이번엔 감미로운 템포의 발라드였다.
몸 안의 쿵쾅이던 텐션이 순식간에 촤악 가라앉았다.
발끝은 느린 박자를 타며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눈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소희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지금 지그시 눈을 감고 그 감정에 푹 젖어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다만 지하철이라는 현실 때문에 눈을 뜨고 참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지독한 절제력 와...'
소희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크게 소리 지르거나 움직이지 않아도,
그 신나는 음악에 온몸을 맡기는 것으로도 엄청난 해방감이 밀려왔다.
다음 역 안내방송이 차갑게 울려 퍼졌다.
남자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내릴 준비였다.
일어나는 그 순간마저도 박자에 맞춰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희는 그 기막힌 타이밍에 속으로 픽 웃음을 터뜨렸다.
'겉은 월요일 표정인데 속은 주말 록 페스티벌이라니.'
퇴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고,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갔다.
[오늘의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원래의 몸으로 귀환합니다.]
2호선. 신도림 방향.
소희는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손잡이 봉을 꽉 잡고 서 있었다.
그런데.
발끝이 혼자서 톡, 톡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어? 나 왜 이래.'
손가락 끝도 허벅지 옆에서 미세하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리듬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소희는 살짝 리듬을 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다들 무표정했고,
멍하니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겉보기엔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들.
하지만 이제 그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저 사람도, 어쩌면 저 사람도… 지금 속으로는 엄청난 콘서트를 열고 있는 거 아냐?'
이어폰을 낀 사람, 눈을 감은 사람, 멍하니 창밖을 보는 사람.
겉모습은 죄다 무표정이지만, 그 속마음은 각자만의 화려한 콘서트
무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희는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리듬에 맞춰 까딱거리고 있었다.
'뭐, 나쁘지 않네.'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의 피로한 기분이 그 리듬을 타고 밖으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소희는 발끝의 잔잔한 박자를 그대로 즐긴 채, 창밖의 한강 불빛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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