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강남ㅡ첫 출근 합니다.
오늘 아침 지하철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딱 봐도 새로 맞춘 딱 떨어지는 핏의 슈트,
아직 다림질 자국도 안 없어진 셔츠 깃,
보통 출근길에는 볼 수 없는 사원증이 벌써부터 목에 걸려 있었다.
남자는 그 사원증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소희는 그 표정을 유심히 봤다.
사원증을 만지는 손끝에 은근한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저 사람 되게 뿌듯해하네 ㅋㅋ
폰에 진동이 왔다.
[체험 티켓이 발급되었습니다.]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소희는 픽 웃었다.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누를 수 있는 버튼이었다.
[Y]
눈이 떠졌을 때 심장이 벌써 두근거리고 있었다.
출근하기도 전인데…
머릿속으로 오늘 할 일들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첫 출근, 첫인사, 첫 커피 타임 등…
(막내니까 내가 타야겠지? 각자 사 먹나?)
(점심은 어떻게 하지? 같이 먹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손이 자꾸 확인했다.
방금 확인했는데 또 확인했다.
사원 이승범.
이 사람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있었다.
거울도 없는데 계속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넥타이가 삐뚤어졌나? 안 삐뚤어졌는데도 자꾸 만졌다.
드디어 회사가 있는 강남역에 도착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깨는 이미 활짝 펴져 있었다. 시선은 정면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회사 로비에 들어서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미리 온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승범은 반사적으로 배꼽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폰을 보고 있었다.
승범만 혼자 우렁찼다.
민망함이 몸을 스쳤다.
근데 이 몸은 그 민망함도 금방 씻어냈다. 괜찮아, 첫날이니까.
사무실 문을 열었다. 팀장이 손을 들었다.
"어, 왔어? 자리는 저쪽."
"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또 너무 컸다. 옆자리 대리님이 슬쩍 쳐다봤다.
승범은 재빨리 목소리를 줄였다.
근데 3초 뒤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또 커졌다.
소희는 그 안에서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이 사람 진짜 어떻게 해… 풉 ㅋㅋ
드디어 첫 임무가 떨어졌다.
팀원들 커피 주문과 배달을 담당했다..
"아. 아 두 잔, 캐러멜 카페모카 아이스 하나, 그리고 저는 뜨아로."
승범은 열심히 받아 적었다. 폰을 들고 있는 두 손이 떨렸다.
출근 첫 심부름이라는 것 자체가 뭔가 되게 큰일처럼 느껴졌다.
회사 바로 맞은편 카페에서 주문을 기다리며 메뉴를 다시 외웠다.
“아. 아두잔이랑.. 요.. 뜨거운 거.. 한 개.. 또…아잠시만..”
덜덜 떨며 얼버무리다 적어온 폰의 메모를 다시 확인하고는 마저 주문했다.
휴우 ㅡ.
소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 사람의 긴장을 온몸으로 체감 중이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웃겼다. 이 사람 첫날부터 아주 다이내믹하네.
커피를 받아 들고는 사무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여기 있습니다!"
목소리가 또 컸다. 대리님이 픽 웃었다.
"고마워, 근데 이거 내 거 아닌데."
캐러멜 카페모카 … 주문오류였다.
이건 그냥 카페라테 아이스였던 것…
늘 아아만 마시던 승범에겐 생소한 메뉴라서 착각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냥 마실께 ^^ 다음엔 잘 기억해 줘!.”
따듯한 선배님의 말 덕분인지 승범의 긴장이 조금은 풀린듯했다.
드디어 점심시간.
선배들이 승범에게 어디 갈지 물어봤다.
그는 조용히 있다가 뭘 시킬지 몰라서 다른 동료를 따라 시켰다.
메뉴가 뭔지도 모르고 시킨 거였는데 나온 걸 보니 의외로 맛있었다.
"입에 맞아?"
"네! 진짜 맛있습니다!"
또 대답이 과했다.
소희는 그 과장된 진심 까지도 웃겼다.
오후엔 실수가 하나 더 있었다.
파일을 팀장님께 보낸 다는 것이 잘못 눌러서 팀장님 메신저가 아닌
다른 팀으로 전송되어 버렸다.
승범이 메신저로 사과 후에, 또 뛰어가서도 직접 사과도 했다.
팀장님께도 연신 사과했다.
모두 첫날의 승범을 아주 잘 이해해 주었다.
그들에게도 처음은 있었으니까…
오늘 내내 그의 얼굴이 벌게진 채 있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실수할 때마다 몸속에서 뭔가 쪼그라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다음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 사람은 그 정도로는 절대 안 꺾이는 강철 마인드였다.
길었던 첫날이 지나 드디어 퇴근 시간.
승범은 자리를 정리하면서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커피 주문 실수, 쩌렁쩌렁한 목소리, 메신저 전송 실수 등등…
온종일 실수투성이였다.
근데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지하철에 타서도 그 미소가 안 사라졌다.
승범은 핸드폰 계산기를 열었다.
첫 월급부터 얼마 모아야 작은 원룸을 탈출할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있었다.
숫자를 몇 번 두드려보다가 한숨 쉬고, 다시 두드리고, 또 한숨 쉬고.
근데 그 한숨에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드디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희는 그 계산기 화면을 같이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 되게 정신없었는데, 이 사람 전혀 안 지쳐 보인다.
[오늘의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원래의 몸으로 귀환합니다.]
2호선. 신도림 방향.
소희는 봉을 잡고 서 있었다.
웃음이 아직 입가에 남아 있었다.
승범이 오늘 하루 종일 실수한 걸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났다.
오히려 그 실수가 이 사람이 오늘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이상하게 마음이 좀 놓였다.
스물둘의 소희도 앞으로 얼마나 많이 틀리고 실수를 하게 될까,
그렇지만 실수가 있어야 그다음도 존재한다는 걸 오늘 승범한테 배운 셈이었다.
실수는 그 당시에는 부끄러운 거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오늘 뭔가를 시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틀릴 일도 없으니까.
지하철 안에선 다들 무표정으로 폰을 보고 있었다.
저 안에도 승범 같은 첫날이 있었겠지.
소희는 그 미소를 잠깐 더 붙잡아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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