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더 해져서 한 권의 예쁜 바카라으로 거듭나고
오늘 나만의 카페는 문을 두 번 열었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지만, 무더위 속 연습실 근처의 이 조용한 공간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아지트다. 본격적인 일에 앞서 차 안에서 치르는 식도락부터 시작한다. 테이크아웃해 온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시원한 커피를 펼쳐놓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그려보는 이 시간이 참 달콤하다.
어젯밤 도착한 교정 원고를 열었다. 꼼꼼한 안내가 있었지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빨간 글씨들이 눈에 박혔다. 넉넉한 일주일의 기한이 주어졌어도 눈앞의 숙제를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내 삶의 속도대로 거침없이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자세히 보니 빨간 글씨의 대부분은 출판사의 원칙에 따른 보조용언 띄어쓰기와 사소한 부호 처리들이었다. 오히려 내 눈에 밟힌 건 문맥상 미묘하게 어긋난 두 군데의 흐름이었다. “단순 오타 교정 위주로 원고를 본다면 이 미묘한 균열까지 잡아내기는 어려웠겠지.” 가벼운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 손으로 직접 매끄럽게 수정을 마쳤다.
내친김에 퇴직 당시 매니저에 대한 언급이 부족해 아쉬웠던 27장도 다시 펼쳤다. 고마웠던 그이에 대한 기억을 꾹꾹 눌러 담아 분량을 더하고 수정본을 메일로 회신했다. 이어 담당 직원과 나눈 통화는 컴퓨터 앞이 아닌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어졌다.
목차의 시각적 단정함: 단순한 줄 표시 대신 여백이 느껴지는 점 두 개(:)로 시선의 정돈을 도울 것.
대화체의 독립성 유지: 평서문과 뒤섞여 가독성을 해치지 않도록, 처음 쓴 방식 그대로 줄 바꿈 처리를 지켜줄 것.
물론 내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전문가의 시선에서 과하다 싶으면 2차 수정 때 편하게 피드백을 달라는 여지도 남겼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도착한 깔끔한 요약 메일.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에 깊은 신뢰가 실린다. 훗날 우리의 조율 과정을 되짚어볼 든든한 이정표가 될 터였다.
이러한 시간이 더 해져서 머릿속에만 있던 원고가 한 권의 예쁜 바카라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나간 날들의 소중한 기록이 담긴 이 바카라이 누군가의 지친 하루에 따뜻한 쉼표가 되기를 바라고, 요동치는 삶을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시간이 흘러 문화의 전당 한문서예 수업으로 향하는 길. 이번에는 토스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챙겨 두 번째 나만의 카페를 열었다. 시원한 커피 한 모금에 달콤한 토스트를 크게 베어 무니 입안 가득 소박한 행복이 퍼진다. 점심과 다를 바 없는 메뉴지만, 내가 가장 애정하는 조합이라 마냥 즐겁다.
초고 파일 『명함이 사라진 날』의 원고도 방금 통화한 내용대로 내 노트북 안에서 단정하게 고쳐 두었다. 출판사가 알아서 해줄 일이지만, 내 원본 초고 역시 같은 결로 맞춰져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집 덕분이다.
모든 숙제를 끝내고 의자를 깊숙이 뒤로 젖혔다. 문득 시계를 보니 주식 시장 마감 5분 전. 화면을 켜자 온통 찬란한 붉은 기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지는 온기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온전한 수익은 아니다. 이틀 전 한국 시장을 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던 상처가 워낙 컸기에, 오늘의 붉은빛은 그 아픔을 가만히 보듬어 봉합해 주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3일간의 평균을 내어보니 나름대로 의미 있는 플러스를 기록했으니 참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붉은 교정지의 긴장과 붉은 주식창의 안도감을 차분히 지나온 오늘 하루.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방을 챙겨 차 문을 연다. 이제 먹향이 은은하게 기다리는 3층 교실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