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에세이집 '명함이 사라진 날'
얼마 전 문을 열었던 그 아파트 지하주차장, 오늘 다시 나만의 비밀스러운 카페 문을 열었다. 어제는 이 공간도 정기 휴무였다. 온종일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온전한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생각날 때 들르는 단골 한정식 식당을 찾았다. 예전부터 입맛이 돋거나 정갈한 여러 가지 반찬이 그리울 때면 찾던 곳이다. 몇 년 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이곳의 가격도 30%가량 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격은 올랐는데 반찬의 전반적인 수준은 예전만 못해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은 혼자 식사하기에 참으로 마음 편한 매력이 있다. 주인 눈치를 볼 필요도 전혀 없고, 실제로도 혼자 와서 묵묵히 수저를 드는 이들이 많다. 주문조차 따로 필요 없다. 자리에 앉으면 그저 "정식하나요"가 전부다. 간판에는 거창하게 한정식이라 적혀 있지만, 소박한 정식이라 부르는 게 훨씬 정겹다.
열 가지 남짓한 밑반찬에 시원한 오이미역 냉국, 그리고 노릇하게 구워진 가자미구이 한 토막이 상에 오른다. 이 집 반찬 중 가장 변함없는 터줏대감은 세 가지 종류의 쌈이다. 다시마와 두 가지 녹색 채소가 나오는데, 가끔 녹색 채소 중 하나는 달콤하게 삶아낸 양배추로 대체되곤 한다. 오늘 역시 그랬다. 이 싱싱한 쌈과 달달하게 삶아낸 양배추 집어 진한 젓갈을 살짝 얹어 싸 먹으면 입안 가득 감칠맛이 퍼진다. 또 하나 변함없는 단골 메뉴는 굽지 않은 날김과 달큼하고 맛있는 간장이다. 오늘도 나는 밥을 두세 번이나 김에 싸 먹었다.
유독 오늘 내 눈길을 사로잡고 입맛을 돋운 반찬은 따로 있었다. 우엉 뿌리를 가늘게 채 썰어 짭조름하게 조려낸 우엉조림이었다. 제법 넉넉하게 담아주셨는데, 달짝지근한 그 맛이 좋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바닥을 비웠다. 이 집의 진짜 별미는 또 있다. 밥이 나오기 전 따끈하게 내어주는 숭늉 한 그릇. 내가 워낙 숭늉을 좋아하는 터라, 밥을 먹으며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식사가 끝난 뒤 입가심으로 또 한 그릇을 들이켰다. 구수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나의 온라인 게임, 그리고 울산의 전경을 표지에 담아
오늘 찾은 식당은 평소 내가 다니는 색소폰 학원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늘 하던 루틴대로 움직였다. 목요일 오후면 잠시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하던 단골 커피 전문점. 오늘은 그곳에서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나만의 카페로 향했다. 차를 몰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의자를 젖히니, 그곳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나만의 카페가 된다.
어젯밤에 출판사에서 온 메일에 답장을 보냈다.
"메일 감사합니다. 계약 시 첨부된 견적서 확인 바랍니다. 표지는 210g이 아니라 230g 아르테 기준입니다. 질감은 무광, 후가공 에폭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보내드린 사진 4장 확인하셨는지요? 흑백 사진 한 장은 본문 적절한 위치에 들어갈 예정이고, 컬러 사진 세 장 중 사각 유리로 멋지게 지어진 건물 사진이 이번 바카라의 메인입니다. 나머지 두 장도 흐름에 맞게 잘 배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구체적인 요구사항들을 담은 내용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오랜 온라인 게임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직을 하면서 오랜 시간 가슴속에 품어왔던 나만의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생각은 늘 굴뚝같았지만 생각만으로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4월, 첫 번째 에세이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과 단단히 약속을 했다. ‘올해 말까지는 반드시 내 이름으로 된 바카라을 세상에 내놓겠다’라고 디데이를 정한 것이다.
그렇게 배수의 진을 치고 글을 써 내려간 지 단 두 달 만에, 5장 33편으로 구성된 자전적이고 생활 철학적인 나의 첫 에세이집 초고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대략 20곳의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했다. 대부분 한 두 달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의 설레는 마음은 2주 정도였다. 두세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그리고 나머지 10여 곳도 연락이 왔지만 스팸으로 처리되어 나중에 본 내용이다. 대부분은,
‘출판사의 출간 방향과는 거리가 다소 멀어 출간이 어려울 것 같다.’
‘모쪼록 눈 밝은 출판사와 인연이 닿으셔서 바카라으로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사실 기성 출판사에서 신인 작가의 글을 채택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주변에서 귀띔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결국 2주 뒤, 나는 반 기획 또는 자가 출판 형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지도 있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출판사 두 곳에 연락을 취했다. 그중 회신이 가장 빠르고 소통이 잘 되는 곳을 선택해 마침내 출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내 손으로 전자 서명한 끝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재 출판사에서는 내 원고의 문장을 다듬는 교정 작업이 한창이다. 조금 전에 보낸 메일은 표지와 내지 디자인 팀에서 온 의견에 대한 나의 피드백이었다. 출판사 측에서는 온라인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바카라 디자인 한두 개를 샘플로 선정해 보내주면 참고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사실 내 눈에 차는 디자인은 별로 없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이 바카라의 전체적인 밑그림이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정든 회사의 미국 본사 건물 전경을 앞표지에 시원하게 넣고, 그 위에 정갈한 글씨체로 제목과 부제를 얹고 싶다. 그리고 표지에는 내 인생의 첫 단추였던 첫 온라인 게임의 전경 사진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울산 야경 사진을 조그마하게 나란히 넣고 싶다. 바카라의 날개 부분에는 스튜디오 느낌으로 멋지게 찍은 내 프로필 사진과 함께 짤막한 저자 소개 및 약력을 적어 넣을 생각이다. 그리고 바카라 내용 중 가장 마음에 울림을 주는 구절 서너 개를 골라 뒤표지와 날개 한편에 정성스럽게 새겨 넣으려 한다. 1차 디자인은 원고 교정과 동시에 진행된다고 하니, 디자인 담당자에게 전화가 오면 내 머릿속의 구상을 명확히 설명하고 시안을 받아볼 계획이다.
삶을 디테일하게 바라보는 시선
교정팀에서 디자인 팀보다 먼저 연락이 왔었다. 내일모레면 1차 원고 교정본이 내 메일함으로 도착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탈고 후에도 몇 차례나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정독하며 다듬었기에 전문가가 보더라도 크게 고칠 부분은 없을 것 같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든다. 물론 전문가의 예리한 시선으로 보면 수정할 부분이 분명히 나오겠지만 말이다. 현재 나의 목표는 다가오는 추석 전에 이 바카라을 세상에 출간하는 것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아마도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될 것 같다.
이번 에세이집을 집필하면서, 아니 초고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부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일상생활 에세이를 몇 편씩 더 적어 내려가고 있다. 지금 지하주차장 차 안에서 끄적이고 있는 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삶을 살다 보니 확실히 세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일상의 아주 사소한 풍경이나 사물을 바라볼 때도 그 시각이 이전보다 훨씬 더 디테일하고 섬세해지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창작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이 변화가 나름대로 꽤 흥미롭고 재미있다. 인생 2막의 서막이 참 아름답다.
아직 사각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머금었다.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커피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운전석 의자를 뒤로 쓱 젖혔다. 몸이 편안하게 내려앉는다.
‘카페에 왔으니, 우선은 이 여유를 조금 더 즐겨야겠다. 그리고 다시 기분 좋게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내일모레 도착할 교정본을 기다리는 지하주차장 나만의 카페에는 시원한 바람과 기분 좋은 커피 향이 잔잔하게 감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