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일탈, 집에서 보낸 3일 44시간

그때는 분명 건강한 휴식이었는데 지금은 일탈(?)

by장호현


​ 소소한 일탈을 감행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나는 또다시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정년퇴직 후 세 번째로 맞이하는 ‘3일간의 집콕’이었다. 그것도 주말이 아닌, 온전히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평일 3일 동안 말이다.


​ 첫 번째는 작년 12월 초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절친과 평생 처음으로 단둘이 포항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여행의 흥이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감기인 듯 감기 아닌 으슬으슬한 기운에 몸을 사리려 일부러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쉬었다. 두 번째는 올해 4월 초, 울산에서 열린 한전 입사 동기 모임 다음 날이었다. 한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우리 사이에 이런 접점이 있었나’ 싶을 만큼 예상치 못한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과음으로 이어졌다. 술병까지는 아니었지만 거의 그 직전의 피로감에 시달리며 다시 3일간 집에서 몸을 추슬렀다.


​ 따지고 보면 앞선 두 번의 머무름은 모두 건강을 지키기 위한 자발적 휴식이었기에 굳이 ‘일탈’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번 세 번째만큼은 명백한 일탈이었다. 이렇다 할 특별한 핑계조차 없었다.


​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사흘간, 나는 내리 집에만 머물렀다. 그리고 그 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채널 고정된 TV 앞에서 보냈다. 한 편당 1시간 3분에서 6분 남짓하는 24부작, 대략 26시간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옛날 드라마를 눈도 떼지 않고 시청한 것이다. 꼬리뼈가 뻐근해지고 허리에 묵직한 통증이 찾아왔지만, 잠자고 밥 먹는 짧은 시간표를 제외하면 내 영혼은 줄곧 TV 화면 속에 묶여 있었다.


​ 내용은 전형적인 재벌가의 이야기였다. 태어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문 이들과 그들의 친척, 그리고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가는 흙수저들의 치열한 아귀다툼. 회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사고파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펼쳐졌다. 드라마의 필수 양념 같은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 오랜 세월 가슴속에 증오를 숨긴 채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관계,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난무하는 온갖 권모술수까지…….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였지만, 한 번 눈길을 주자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리모컨을 쥔 손을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음 편을 재생했다.


​ 문득 몇 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당시 총 95부작에 달하는 드라마 <삼국지>를 무려 15일에 걸쳐 완주한 적이 있었다. 한 편에 42분씩,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하면서 집에 돌아와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보았던 기억이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생생한 영상으로 다시 만나는 즐거움이 대단했다. 한창 빠져 있을 때는 매 회 시작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오프닝 음악이 ‘이제 그만 자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과 겹쳐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금처럼 시간적 여유가 넘치는 때에 다시 보면 더 좋으련만,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 거대한 대작을 새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 또 다른 기억 속의 드라마는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편당 1시간 15분에 이르는 16부작 드라마였는데, 감히 재벌 소재 드라마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그때도 회사 생활을 치열하게 하던 중이라 틈나는 대로 시간을 쪼개어가며 정말 흥미진진하게 시청했다.


​ 하지만 돌이켜보면 <삼국지>나 <재벌집 막내아들>을 볼 때는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결코 ‘일탈’이라 느끼지 않았다. 맡은 바 온라인 게임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의 취미를 쪼개어 즐긴 건강한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일상과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점심을 먹자마자 색소폰 연습실로 득달같이 달려갔을 시간이었다. 연습실 문을 나서며 ‘아유, 내일은 좀 쉬어야지’ 해놓고도, 다음 날 점심만 먹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또다시 연습실로 달려가던 것이 근래 나의 완벽한 일상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한문 서예 수업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마음 한구석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 ‘갈까 말까’ 저울질을 하다가 이내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루틴을 멈춘 채, 드라마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 덕분에 시간상으로 44시간 만에 드라마는 시원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화면이 꺼지고 찾아온 적막 속에서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번 학기 들어 금요일에 있는 수묵화 수업과 한글 서예 수업을 참 많이도 빠졌다.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 빠졌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날에도 그저 기분에 따라 수업을 제쳐두곤 했다.


​ 처음 서예를 시작할 때의 뜨거웠던 열정과 비교해 보면, 내 마음이 서서히 약해지고 흐려진 걸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느슨해져 버린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시작한 이 일들이 모두 하기 싫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설렘과 몰입의 깊이가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배움들을 아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정말이지 단 1퍼센트도 없다.


​ 내일은 분명, 밖에서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색소폰 학원 수업에 갈 것이다. 인생의 여러 취미 중 여전히 나를 가장 설레게 하고, 가장 열정을 쏟게 만드는 것은 역시 색소폰 연주다. 때로는 손가락이 꼬이고 마음대로 소리가 나지 않아 어렵고 힘들지만, 배움이 이어지는 즐거움과 미세하게나마 다듬어져 가는 실력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만두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 이제야말로 진짜 실력이 한 단계 도약할 중요한 시기라는 직감이 든다. 딱 두 달만 더 지나면 색소폰을 잡은 지 어느덧 3년이 된다. 취미를 넘어, 이제는 나의 어엿한 ‘특기’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은퇴 후 시작한 수많은 일 중 가장 잘한 선택을 꼽으라면 단연 이 묵직한 악기를 가슴에 안은 일이다.


​ 44시간 동안의 긴 일탈은 끝났다. 드라마 속 남들의 화려한 전쟁터에서 걸어 나와, 이제 나는 내 손때 묻은 색소폰과 함께 다시 정답고 평온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부드러운 호흡을 불어넣을 내일의 연주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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