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항로 일탈, 그리고 동해

시곗바늘의 위치와 내 마음의 환기만이 조금 달라졌을 뿐

by장호현

이제 몇 달 후면 문화의 전당 수업이 4년 차에 접어든다. 정년퇴직을 1년 남짓 앞두었을 때, 나는 색소폰과 한문 서예, 그리고 수묵화를 시작했다. 색소폰과 한문 서예는 오래전부터 은퇴 후 삶의 목록에 올려두었던 것들이지만, 수묵화는 우연히 끼어든 손님이었다. 한문 서예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먹을 갈고 만져야 하니, 먹으로 할 수 있는 또 다른 예술이 없을까 찾다가 같은 문화의 전당에 개설된 수묵화 수업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1년이 흘러 진짜 퇴직을 맞이했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한글 서예까지 영역을 넓혔다. 한글 서예 수업은 수묵화 수업이 끝나고 정확히 20분 뒤에 시작되었는데, 같은 자리에서 먹을 연이어 쓸 수 있다는 효율성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훗날 수묵화를 그리고 나서 멋진 화제(畵題) 글을 남길 때 큰 도움이 되리라는 남다른 기대감도 있었다.


기대감으로 시작된 매주 금요일의 강행군. 오후 12시부터 3시 40분까지 두 개의 수업이 쉼 없이 연달아 이어진다. 정오에 수업을 시작하려면 사실상 11시 40분에는 교실에 도착해야 한다. 물도 떠다 놓고 먹도 갈아두며 이것저것 준비를 마쳐야 비로소 붓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금요일의 네 시간은 오롯이 이 두 수업을 위해 통째로 바쳐지는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은 정년퇴직 이후의 삶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위해 정성껏 차려 놓은 밥상이었다. 시작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더해 작년 늦은 가을부터 올봄까지 6개월 동안은 사주명리학 수업까지 추가되었다. 인간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일은 참 쉽지 않은 배움이었다. 너무 깊이 빠져들기보다는 그저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징검다리 정도로만 삼고 싶어,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한 뒤 배움을 멈추었다. 이 다채로운 배움들 덕분에 나의 은퇴 이후 일정은 현역 시절 못지않게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금요일의 연강은 솔직히 체력적으로 만만치 않다.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데다, 시간대마저 점심시간을 관통하는 오후다. 그래서 금요일 아침이면 의식적으로 아침 겸 점심을 든든하게 챙겨 먹는다. 오후 내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강의실에 준비된 간식으로 간간이 허기를 달래긴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기분 좋은 피로감이 얹혀 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차를 몰고 문화의 전당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오는 길에 테이크아웃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홀짝이며 운전석 의자를 조금 뒤로 젖혔다. 스마트폰으로 주식 시황과 시세를 확인하고, 포털사이트의 뉴스들을 훑어보며 나만의 짧은 휴식을 즐기던 그때, 문득 망설임이 밀려왔다.


‘오늘 꼭 3층으로 올라가야 할까?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버릴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이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에서, 이 시간이 되면 불쑥 고개를 드는 생각이었다. 퇴직 후의 삶을 너무 힘차게 달려온 건 아닐까? 나 자신을 너무 빡빡한 시간의 틀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독백. 보통은 그러다가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3층 강의실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에 홀린 듯 달랐다. 나는 과감히 시동을 걸고 지하 주차장 밖으로 차를 몰아 나왔다.


막상 밖으로 나왔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북부순환도로를 지나 공항 옆을 거쳐, 호계에서 산길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예전에 골프를 치러 자주 오가던 낯익은 길이었다. 산꼭대기 삼거리 근처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풍경이었다. 멀리 초록빛 골프장이 펼쳐져 있고, 시선을 더 멀리 던지니 푸른 동해 바다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니 저 멀리 아파트 단지들이 성냥갑처럼 조그맣게 보이고 공항의 활주로도 눈에 밟혔다. 그곳이 공항임을 이미 알고 있기에 내 눈에 공항으로 보이는 것이리라.


산꼭대기 삼거리에 자리 잡은 작은 포장마차에서 양은냄비에 끓여주는 라면이라도 한 그릇 먹을까 싶었지만,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워낙 든든하게 먹고 나온 터라 크게 당기지 않았다. 다시 차에 올라타 반대 방향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법 꼬불꼬불한 산길이었지만, 푸른 녹음 속을 달리는 드라이브는 마음을 탁 트이게 해 주었다.


한참을 내려가다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나자 아담한 동네가 나타났다. 우회전을 해 곧장 나아가니, 이윽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햇살을 받아 일랑이는 청량한 동해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수욕장이다.

바다가 잘 보이는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 앉아 멍하니 파도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시원해졌다. 문득 이 근처에 살고 있는 키가 조그마한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화라도 한 통 걸어볼까 망설였다. 하지만 막상 만나면 시원한 물회라도 한 그릇 나누어야 할 텐데, 아직 배는 부르고, 차나 한잔 마시자고 불러내기엔 이곳에서 보내야 할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결국 아쉬운 망설임을 접어두고 정자 방향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천천히 운전을 하며 왼쪽에 펼쳐진 바다 풍경을 감상하다가, 예전에 한번 가본 적이 있는 거대한 대형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해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나왔다. 카페 안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지지만 나는 카페 안의 세련된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에 영 취미가 없다. 설령 앉아 있더라도 급하게 마시고 일어나기 일쑤라, 굳이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아늑한 카페는 바로 내 차 안이다. 운전대를 잡고 창밖 풍경을 보며 천천히, 조금씩 음미하는 아이스커피야말로 나만의 온전한 휴식 공식이다.


다시 정자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망설임이 찾아왔다. 주전 해안도로를 거쳐 울산 시내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곧장 산을 넘어가는 직선도로로 들어설 것인가? 내 차는 자연스럽게 시내 방향의 직선도로를 택했다. 다음번에 누릴 또 하나의 소소한 일탈을 위해, 주전의 아름다운 길은 아껴두기로 한 것이다.


차는 울산 방향으로 거침없이 달렸다. 눈앞에 커다란 고개가 나타났다. 저 고개만 넘으면 벌써 익숙한 울산 시내다. 조금의 아쉬움이 밀려온다. 서서히 도시의 빌딩 숲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제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마음이 서성였다.


그 순간, 내 손은 이미 익숙하게 핸들을 돌려 색소폰 학원 근처의 한적한 주차 자리를 찾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의 소소했던 항로 이탈. 그러나 그 마무리만큼은 결코 일탈이 아니었다. 결국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의 일상 공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직 시곗바늘의 위치와 내 마음의 환기만이 조금 달라졌을 뿐, 나의 짧고 달콤했던 금요일의 방랑은 그렇게 완벽한 일상 복귀로 막을 내렸다. 다시 악기를 잡을 시간이었다.


은퇴 후 내 삶에 색소폰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또 한없이 감사한 일이다. 이 길을 시작한 덕분에 내 하루는 비로소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이토록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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