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사각거리는 커피 한 잔과 휴대폰
예전에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가 마음이 제일 편하고, 혼자 차 안에 머물 때가 그렇게 아늑할 수 없다"라고. 그때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화장실이 편하다는 점에는 선뜻 공감하기 어렵지만, 세월이 흘러 '혼자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의 미학만큼은 가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곳은 이미 분주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완벽한 '나만의 카페'다.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손에 쥔 휴대폰 하나면 더할 나위가 없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가끔은 빛바랜 옛 사진들을 들춰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물론 주식 시장이 열리는 시간대라면 단연 주식 앱이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화면 가득 빨간 불이 켜지는 날이면, 나만의 카페 분위기는 생각 이상으로 감미로워진다. 반대로 파란 불이 켜져 씁쓸한 날에는 슬그머니 주식 창을 닫고, 평소 색소폰으로 연주하던 즐겨찾기 노래를 틀거나 내가 써 내려가던 글들을 소리 내어 읽고 다듬는다.
가끔 이 카페는 움직이는 집무실로 변신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문서를 편집하고, 오래전부터 관리해 온 나만의 엑셀 파일을 열어 데이터를 수정하고 업데이트하곤 한다. 게다가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통화하기에도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긴 통화가 필요하거나, 연결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상담원과의 전화는 일부러 이 시간을 위해 미뤄두기도 한다. 참 편리하고 고마운 공간, 내 차 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동식 카페'다.
추운 겨울에는 찬 바람을 피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명당이나 지하 주차장으로,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고가도로 밑 주차장으로 언제든 간판을 바꿔 달 수 있으니, 날씨에 따라 풍경을 바꾸는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오늘도 그랬다. 계기판 온도가 34도를 웃도는 무지막지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다. 점심으로는 문득문득 생각나는 단골집의 '우동 정식'이 당겼다. 그 집은 주차 공간이 마땅치 않으면 그냥 지나쳐야 하는 곳인데, 다행히 오늘은 한쪽 구석에 빈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기분 좋게 차를 대고 들어가 자연스럽게 주문을 마쳤다.
이 집에 올 때면 일부러 배를 조금 굶주린 상태로 오곤 한다. 워낙 푸짐하게 나오는 양을 잘 알기 때문이다. 쫄깃한 면발 위에 짭조름한 간장을 자작하게 부어 먹는 우동, 달콤 짭짤한 돼지고기 볶음, 소시지 한 조각과 두툼한 달걀말이가 올라간 밥과 바삭한 새우와 단호박 튀김, 그리고 아삭한 양배추 샐러드까지. 든든하게 그릇을 비워내니 밀려오는 포만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기분 좋은 식사 후, 색소폰 연습실 근처의 자주 가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이미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미련 없이 차를 돌려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있는 다른 커피 전문점 앞에 차를 대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다시 연습실 근처로 돌아와 주변을 잠시 맴돌다가, 태화강 건너 중구로 넘어가는 고가도로 밑 주차장을 발견했다. 마침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고, 망설임 없이 그곳에 차를 밀어 넣었다. 무더운 열기를 차단해 주는 고가도로 그늘 아래, 오늘 만의 '나만의 카페'가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홀로 누리는 이 고요한 휴식이 참 달콤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휴대폰을 열어 아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숫자 '1'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 메시지를 읽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최근 일주일 동안 아들 녀석과 거의 매일 통화를 했다. 대학 진학 때문에 울산을 떠난 지 어느덧 7년이 넘었지만,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본래 아들은 아내와 자주 통화를 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아주 가끔이었다. 용무(?)가 있을 때나 문자를 보내곤 했다. 나 역시 무뚝뚝한 성격 탓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아내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 목감기 기운이 있어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는데, 멀리 사는 아들 녀석의 마음이 꽤나 쓰였던 모양이다. 매일 저녁마다 녀석에게서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건강은 좀 어떠세요? 목은 좀 괜찮으세요?"
"응, 많이 좋아졌다. 걱정 마라."
"식사는 챙겨 드셨어요?"
투박하지만 다정한 말들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곤 했다. 그러던 녀석이 불쑥 다음 주 제헌절 연휴에 맞춰 집에 내려오겠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연휴라 기차표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마 예약하기 힘들걸. 아무튼 한번 알아보고 예약 가능하면 해봐라."
내 염려대로 다음 날 아들은 표가 거의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KTX와 SRT를 타고 판교로 숱하게 출장을 다녔던 나에게는 남다른 노하우가 있었다. 취소 표를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전에는 밤 12시 근처, 지금은 새벽 일찍 예매 앱에 접속하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알람도 없이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눈을 비비며 예매 앱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매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오고 가는 편수 몇 장에 예약대기를 걸어두었다. 그리고 그다지 기대를 안 했던 오늘 아침, 생각보다 많은 대기표의 예약이 성공했다는 알림이 떴다. 비록 원했던 황금 시간대는 아니었지만, 아들이 울산에 내려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가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알맞은 시간대였다.
기쁜 마음에 정확한 일정을 조율하고자 결제 전 아들에게 문자를 남겨두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야속한 숫자 '1'은 지워질 줄을 모른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마음 놓고 푹 자나 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차 안, 얼음이 사각거리는 커피를 마시며 나는 여전히 기다림을 즐기고 있다. 바쁜 학교 생활에 치여 이제야 메시지를 확인할 녀석의 전화를 기다리는 이 시간.
매일 스쳐 지나가던 고가도로 밑 주차장이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설레고 아늑한 나만의 카페가 되어준다. 이제 곧, 반가운 아들의 목소리로 이 공간이 가득 채워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