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붕어빵 한 마리와 나만의 호흡
점심을 먹고 나면 발길은 언제나 관성처럼 움직인다. 식당 근처, 이제는 눈을 감고도 훤히 찾아갈 수 있는 커피 전문점들. 중국집 옆, 고등어찌개 집 옆, 김밥집 옆, 그리고 비빔밥 집 모퉁이까지. 내 머릿속 지형도에는 점심 식사 후 거쳐 가야 할 ‘아이스 아메리카노(아아) 지도’가 픽셀 단위처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더운 여름은 물론이고,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나의 선택은 늘 요지부동 ‘아아’였다. 그것은 기막힌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십수 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오랜 친구이자 물보다 더 익숙해진 일상의 거부할 수 없는 한 조각이었다. 집에서는 굳이 커피를 찾지 않으면서도, 밖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마시는 그 시원한 한 잔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신성한 의식이자 하루의 루틴이었다.
하지만 내 단조로운 일상에는 늘 ‘당뇨’라는 묵직한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50대 중반,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의사에게 운동으로 수치를 반드시 개선해 보겠노라고 야심 차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그 냉정한 한마디는 내 식생활 전반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을 세웠다. 선고와도 같았던 그 벽 덕분에 얼음 띄운 콜라, 달콤한 주스, 노란 봉지커피는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내 삶에서 멀어졌다. 그 모든 갈증의 대체재가 결국 아아였고, 그렇게 유독 아아 만은 끝까지 내 곁에 든든한 아군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웬일인지 그 견고하던 루틴의 틈새로 낯선 바람이 불었다. 점심을 먹고 평소처럼 커피숍을 향해 걷던 발걸음이 어느 편의점 앞에서 뚝 멈춰 선 것이다. 홀린 듯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대신 ‘아이스 붕어빵 한 마리’를 쥐고 나왔다. 내 오랜 루틴을 배반하는, 아주 소박하고도 과감한 일탈이었다.
차 안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문 아이스 붕어빵은 야속할 정도로 달콤했다. 몇 달 만에 혀끝을 적시는 이 차갑고 진한 달콤함이라니. 야금야금 줄어드는 붕어빵의 꼬리를 바라보며 문득 애틋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다음번엔 또 언제 이 달콤함을 허락할 수 있을까.’
이 아쉬움은 절박함이 아니다. 스스로 정해둔 건강이라는 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마땅한 인내’ 임을 알기에, 역설적으로 그 맛이 더욱 귀하고 애틋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달콤한 흔적을 모두 비워내고 나니, 이제는 가슴을 뜨겁게 울릴 시간이다. 내 차는 익숙한 학원 근처 주차장에 멈춰 섰다. 오늘 연습할 메인 곡은 배금성의 <사랑이 비를 맞아요>.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곧바로 노래 선율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색소폰 조립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나만의 통과 의례가 있다. 째깍거리는 메트로놈을 켜고, 호흡을 길게 뽑아내는 롱턴, 음을 가늘게 떨며 흔드는 비브라토, 음을 다채롭게 만드는 꾸밈음, 그리고 그 주의 스케일을 차례로 연습한다. 거기에 요즘 부쩍 관심이 깊어진 몇 가지 펜타토닉과 블루스 스케일까지 더하고 나면, 본격적인 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오늘 할 일 다 한 듯한 후련함이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색소폰 실력 향상에는 이 지루한 기초가 무엇보다 정답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단 하루도 이 과정을 거르지 않는다. 짧으면 30분, 길면 한 시간 가까이 흐르는 이 인고의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온전한 노래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그 누가 알 수가 있나”
애절한 노랫말처럼, 가슴 깊은 곳의 응어리를 후벼 파는 선율이 색소폰의 음색과 참 애달프게도 어우러진다. 깊고 거친 서브톤(Subtone)을 실어 비에 젖은 사랑을 바닥으로 낮게 깔아본다. 그러다 감정이 최고조로 치닫는 구간에 다다라, 마음을 사정없이 뚫고 지나가는 칼톤(Growl tone)의 강렬함을 한껏 내지른다.
“왜 나를 사랑했나요 왜 나를 미워했나요”
숨을 쥐어짜 내며 악기를 울릴 때, 가슴 한구석에 맺혀 있던 묵은 응어리마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한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온몸을 관통한다.
한참을 그렇게 한 곡을 불고 나면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지만, 진짜 연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숨을 고르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무기, 연주 목록(플레이리스트)을 불러온다. 그 안에는 언제 어디서든 반주만 나오면 튀어나갈 수 있도록 갈고닦은 손때 묻은 20여 곡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매일 연습 때마다 이 모든 곡을 다 불어볼 수는 없지만, 나는 최대한 많은 곡을 연주하려 애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열 곡, 조금 지치는 날은 대여섯 곡 정도를 골라서 한 곡당 두 번씩 진하게 불러본다. 특별히 긴 연습을 거치지 않고도 언제나 무대 위에 설 수 있도록, 몸과 손가락이 기억하게 만드는 나만의 혹독하고도 즐거운 훈련법이다. 그렇게 플레이리스트를 한 바퀴 돌고 나면 그야말로 땀으로 땀으로 목이 축축하게 젖는다.
마침내 만족스러운 호흡을 끝내고 악기를 조심스럽게 분해해 케이스에 넣는다. 연습실 문을 나설 때면 어김없이 기분 좋은 혼잣말이 새어 나온다.
“아, 역시 색소폰이 최고야. 오늘 또 오기를 정말 잘했네.”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편안하게 TV 앞에 앉아 오늘 하루를 반추해 본다. 아아 한 잔 대신 선택했던 아이스 붕어빵 한 마리의 달콤함, 그리고 지루한 기초 연습 끝에 가슴을 뜨겁게 적셨던 <사랑이 비를 맞아요>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가 남긴 짙은 색소폰 선율.
남들에겐 사소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더없이 확실한 이 행복들이 곁에 있기에, 내가 걸어가는 ‘꾸준한 관리’의 길은 결코 외롭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내일은 또 어떤 선율이 내 하루를 채울까? 달콤한 여운이 아직 입안에 맴도는 듯한, 참 좋은 저녁이다.